한 소녀가 말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산등성이를 향해 질주한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폐가들이 늘어선 산동네 골목길. 오로지 굶주린 개들만 짖어댄다.

영화 '혜화, 동'의 오프닝이다.

민용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 '혜화, 동'은 아리고 시리다.

아이를 버린 20대 부모의 죄책감과 고통이 스크린에 넘실댄다.

인물들의 들숨과 날숨 속에 하얀 김이 서리고 개들이 산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닐 때는 풍경뿐 아니라 마음마저 황량해진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주인공 남녀가 견뎠을 5년이라는 시간이 먹먹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삶을 응원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 수도 있다.

반전다운 반전도 있는 이 영화는 데뷔작으로는 보기 드문 내용적 성취와 정서적 호소력을 지녔다.

2010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독립스타상(배우부문), 코닥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고등학생 혜화(유다인)는 한수(유연석)의 아이를 임신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혜화는 한수가 돌연 캐나다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어느 날. 혜화 앞에 한수가 나타난다.

한수는 입양된 아이를 찾자고 제안하지만 혜화는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아이가 자꾸만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혜화는 아이를 납치하려 유치원에 가지만 미수에 그친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온 혜화. 자신의 침대 위에 한수와 아이가 누워 있다.

혜화는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본 후 전화기를 든다.

영화는 107분간 한 여인과 한 남자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개밥을 주는 행동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을 통해 인물들의 정서를 전한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혜화와 한수를 따라간다.

이야기가 흐름에 따라 그들이 겪은 과거의 아픔과 슬픈 상처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영화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끝을 향해 나아간다.

막판 납치 사건으로 혜화가 경찰에 연행됐을 때는 긴장감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내용적 반전보다는 정서적 반전이 돋보인다.

한수라는 인물은 반전을 통해 궁상맞은 마마보이라기보다는 한없이 착하기에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로 승화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혜화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한수의 영화이기도 하다.

유다인과 유연석의 연기는 훌륭하다.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한 유다인의 무표정함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법하다.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됨에도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거의 없다.

사운드를 이용해 긴장감을 높여가는 감독의 역량도 돋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