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닷컴] 신라의 궁성인 월성 남쪽의 폐사지(廢寺址)인 인용사지 우물에서 통일신라의 사초(史草)로 보이는 목간(木簡)이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6일 “경주시 인왕동 인용사지 우물을 발굴조사한 결과 길이 15.8㎝,너비 1.38㎝,두께 0.77㎝의 소나무 목간을 발굴했다”며 “목간의 앞뒤 양면에서 묵서(墨書)가 40여 글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연구소에 따르면 목간의 앞면에는 길이 방향으로 한 줄만 글씨가 쓰여 있으나 뒷면에는 두 줄의 묵서를 서로 엇갈리게 써놓았다.서체는 전형적인 왕희지체로 매우 능숙하게 쓰인 글씨체라고 연구소는 전했다.



목간의 내용은 왕에게 대룡(大龍)이 소귀공(所貴公) 등 두 사람에 대한 평(評)과 천거(薦擧)를 아뢰는 내용으로 추정된다.이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이 목간은 어떤 사실을 기록한 자료로서,정식문서로 정리하기 전 단계의 기록인 사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또한 ‘대룡’이라는 인물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딸인 대룡부인(大龍夫人)으로 비정(比定)돼 목간의 연대를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이에 따라 이 목간은 9세기 무렵의 이두 연구와 신라 하대 정치상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인용사지에서는 또 7세기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와축(瓦築)기단 건물터도 발견됐다.와축기단은 그동안 사비시기(538~660) 백제 지역에서 조사·보고된 백제의 전형적인 기단 축조법으로 알려져왔다.



인용사지 와축기단은 백제 지역 사례와 달리 기와를 경사지게 엇갈려 쌓았으며,기단 내부에서 수습된 단판연화문 수막새,단각고배 등의 출토유물과 건물지의 중복관계 등으로 볼 때 7세기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연구소는 추정했다.



인용사지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폐사지로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인용사지로 소개됐으며,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인 김인문(628∼694)이 당나라의 옥중에 있을 때 그를 위해 신라사람들이 절을 지어 인용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고 해서 ‘전(傳)인용사지’로도 불리고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