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꽃 창 열어젖히고 무거운 머리 쳐든/ 이삭꽃의 적막 가까이 원기 잃은 햇살 한 줌/ 한때는 왁자지껄 시루 속 콩나물 같았던/ 꽃차례의 다툼들 막 내려놓고/ 들릴락 말락 곁의 풀 더미에게 중얼거리는 불꽃의 말이/ 가슴속으로 허전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벌 받는 것처럼 벌 받는 것처럼/ 꽃 진 자리에 다시 써보는/ 뜨거운 재의 이름/ 시든 화판을 받들고 선/ 저 작은 풀꽃이 펼쳐내는 이별 앞에/ 병든 몸이 병과 함께 비로소 글썽거리는,해거름!'(<꽃차례> 중)

'꽃차례'는 꽃이 대궁 위에 붙기까지 그 순서를 이르는 말이다. 햇빛을 받으며 옆의 다른 꽃에 질세라 몸살을 떼로 앓던 꽃들,햇살이 기운을 잃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어간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이삭꽃 하나가 남았다.

시인 김명인씨(63)의 아홉 번째 시집 《꽃차례》에는 물고 물리는 순환의 시편들이 여럿 실렸다. <천지간>에서는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는 풍경이 보인다. 그런데 밤과 낮,저녁과 새벽의 경계는 적대적이지 않다. 김씨는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고 표현했다.

<쌍가락지>에서도 '헤어지지 말아요!/ 해의 누이 달이 속삭이는 소리/ 약속을,동쪽 끝에 걸어두었는데 어느새/ 혈육으로 깁지 못하는 저녁'이 온다. 그래도 시인은 저녁을 약속이 깨지는 어두운 절망의 시간이라고 규정짓지 않는다. '이 구멍은 테두리뿐인 가락지처럼 속이 환하다!'고 외치며 저녁 속에 내재된 아침,어둠 속에 숨은 빛을 암시한다.

<올망졸망>에서는 '겨우내 가뭄 타서/ 마당의 화초들 몇 그루나 말라죽었지만/ 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 산 입들은 윤기나는 새잎 펄럭거리며 오월로 간다'고 한 자리,같은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순환과 이어짐을 포착했다.

어머니에 대한 시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구순 노모를/ 예순 아들이 안고 목욕'시키는 풍경을 다룬 <다라이 타고 나르는 구름>에서는 '아뜩한데 엄마,엄마/ 다라이 속으로 주름살만 가득 부수시네?m'라고 묘사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