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1948년 도쿄대생이 절도죄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냥 넘어갔을 이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절도범죄의 내용이 아니라 "현대세계에서 무엇이 범죄이고 아닌지는 아무도 규정할 수 없다"는 그의 냉소적인 변명 때문이었다. 시대의 혼란과 허무를 이보다 더 똑떨어지게 표현하기는 어려운 절묘한 말이었던 것이다.

#2.1950년 9월에는 한쌍의 젊은 남녀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청년은 니혼대의 운전기사였고 여자는 열여덟살 난 대학교수의 딸이었다.

청년은 대학에서 강탈한 돈으로 귀여운 애인과 흥청망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자 '오,미스테이크(Oh,Mistake)!'라고 했다. 이 짧은 영어 표현은 미군 점령 기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됐다.

갱영화 마니아였던 이들은 일본어와 수상쩍은 영어를 적당히 뒤섞은 말로 대화했고 낭비와 성적 탐닉에 몰두했다. 사회는 이들을 부도덕한 전후세대의 상징처럼 취급했지만 너나없이 살기 위해 변절하는 현실 속에서 과거의 일들,심지어 전쟁까지 그저 '미스테이크'로 치부해버려도 되는 풍조를 낳았다.

태평양전쟁의 승자이자 점령군으로서 전후 6년 동안 일본을 통치한 맥아더 사령부(GHQ)와 미국은 과연 군국 일본을 해체하고 재건의 기초를 닦는 데 성공했는가? 존 다우어 MIT 교수(역사학)는 전후 일본사회에 만연한 자가당착과 무책임 현상을 예로 들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맥아더 사령부는 전쟁기구였던 일본의 옛 관료 시스템에 의존한 간접통치를 선택했다.

단지 '실무상의 이유' 때문에 점령군과 일본 관료라는 이중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미군이 점령을 끝내고 철수하자 일본 관료제는 전쟁 이전보다 더 강력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냉전 구조의 필요성에 따라 천황제는 '반쯤 하늘에서 내려온' 천황제 민주주의라는 자가당착을 제도화했다. 민주주의는 어디에나 갖다 붙여도 즉시 마력을 발휘하는 부적이어서 앞뒤 안 맞는 관료제 민주주의도 버젓이 통용됐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평화헌법을 강요하던 미국은 돌연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무소불위였던 맥아더 사령부는 이처럼 패전의 빈 공간을 혼란과 허무로 채웠고,모든 것을 '미스테이크'로 치부해도 되는 도덕적 불감증을 키웠다.

다우어 교수는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는 역사학자다. 《일본 디자인의 요소》(1970년)와 《일본 사진의 한 세기》(1980) 같은 의외다 싶은 저작도 있고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지옥의 불'(1986년)을 제작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는 《Embracing Defeat》(1999년).저자의 다양한 연구 성과가 응축된 '일본 점령기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점령기 일본과 미군을 기록한 70여장의 도판사진이 두툼한 책의 부담을 한결 덜어준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