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의 시인' 김병종씨(56 · 서울대 미대 교수)는 어쩌면 풍경을 채집하며 낯선 길 위에 영원히 서 있어도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모른다. 지난 2006년 남미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중남미를 따라 그 곳의 공기를 들숨날숨 들이키고 내뱉으며 길 위의 구석구석을 채색해왔다. 기왕에 '길'을 화두로 꺼낸 마당이니 작가는 얼추 10년은 길 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게 틀림없다.

북아프리카와 카리브 연안을 여행하면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을 모은 김씨의 개인전이 2~21일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길 위에서-황홀'.지난해 여름 알제리,튀니지,모로코와 몰타,카리브해 연안의 길목에서 틈틈이 천혜의 경관과 인상적인 곳을 사진에 담고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면 느낌을 담은 스케치 작업을 벌인 뒤 귀국해 완성한 신작 50여점이 걸린다. 서민들의 잔잔한 삶,기억에 새김된 풍경들을 옮겨 놓은 화폭은 하나같이 강렬한 원색 너머로 생명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동안 생명의 노래를 화폭에 담아오고 있는 김씨는 "모든 생명은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이어지게 마련"이라며 "북아프리카 등 제3세계 역시 언어 이전에 시선교감을 하다 보면 따듯한 생명의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고 말했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옮겨진 덕분에 전시장은 눈이 부시다. 쿠바 역사의 비애마저 환희로 녹여 버리는 뮬라토(흑백 혼혈인) 여인네들의 현란한 몸짓,초록색의 수많은 나무와 꽃들이 영기를 뿜어 대는 마조렐의 정원,아이가 잔잔한 옥빛 바닷물에 풍덩 뛰어드는 카리브 해변,유럽 화가들이 가장 화폭에 담고 싶어 한다는 튀니지안 블루의 시디브사이드,와르르 쏟아질 듯한 사하라의 별밤,거세게 내리치는 햇볕 등이 금방이라도 화폭 밖으로 확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작가가 유독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 있다. 모로코 라밧에서 만난 마조렐의 정원에 주목한 '마조렐의 정원'시리즈다. 초록색이 얼마나 강렬하고 아름다운지 일깨주는 데다 황홀한 미감이 덩어리채 느껴지는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 화가 자크 마조렐이 꾸몄다는 이 정원은 유명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사들여 관리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서울대 미대 학장,서울대 미술관장 등을 역임한 김씨는 1980년대엔 사회 참여 작품인 '바보 예수'시리즈를 그리다가 1989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고 건강을 되찾은 뒤에는 '생명의 노래'시리즈 작업을 이어왔다. 저서로는 《김병종의 화첩기행》 《김병종의 라틴 화첩기행》 등이 있다.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