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박쥐’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극도로 엇갈린다고 한다.

아마도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대중성(관능성과 초자연적 괴력 등등)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요소라면 필연적으로 그에 수반되는 잔혹함(죽음과 시체,선혈 낭자한 모습 등등)이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두가지 측면 중 어느 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보기 편한 영화가 될수도, 역겨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 같은 잔혹함과 관련된 이율배반적 현상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실제로는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미지 상으로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점들을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차단당해 한 단계 초월한 새로운 인식을 받게 된 사람이다. 바로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다.

이 ‘위대한’ 혁명가의 최후의 모습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관련자들의 정치적,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매스미디어의 신화창조에 의해 천차만별의 다양한 내용들이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

확실한 것은 그가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정글 유로 협곡 상단 지역에서 다른 동료 한사람과 함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생포됐다는 점이다. 당시 체 게바라는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포로가 된 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이 유명한 세계적 혁명전사가 잡혔다는 소식은 곧바로 무선을 통해 발레그란데의 볼리비아 특공대 사령부로 전해졌다. 곧 육군중령 안드레아스 셰이크가 헬리콥터를 타고 급히 와서 신분확인을 한 뒤 다른 두명의 게릴라와 함께 게바라를 인근 마을인 라히게라로 이송했다.

이어 이 거물 포로를 어찌해야 할지 발레그란데로 문의했다. 하지만 특공대 사령부도 이 유명한 포로 처리를 결정하지 못하고 최고 사령부에 문제를 떠넘겼고, 최고 사령부는 다시 대통령의 결정만을 기다리게 된다.

결정이 미뤄지는 사이 체 게바라는 포박된 채 현지 학교건물에 감금된다. 체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는 사이 이 유명인사를 지척에서 보기위해 볼리비아 군장교와 사병들이 줄을지어 학교를 방문했다.

다음날 새벽 특공대 사령관 호아킨 첸테노가 CIA 요원과 함께 라히게라에 도착했고 체 게바라의 신원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어딘가로 무선으로 타전한다. 체 게바라가 소유하고 있던 문서들을 사진 촬영하던 도중 정오 무렵에 체 게바라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하지만 추상같은 명령에도 불구, 처형을 진행할 사람을 구해야 했고 게릴라전에서 세명의 전우를 잃은 하사관 마리오 테란이 복수를 하고자 임무를 자청했다. 결국 테란이 1967년 10월 9일 13시 10분에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

체의 시신은 헬리콥터에 묶여 발레그란데로 이송됐고 이곳 염습소에 안치된 시신은 다음날 운집한 언론인에게 공개됐다. 체 게바라는 ‘공식적’으로는 “전투중에 부상을 입고 곧바로 절명한 것”으로 발표됐다.

이 유명한 혁명가의 묘소가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체 게바라의 시신을 신속히 없애려 했지만 “혹시나 체 게바라가 아니면 어쩔까”하는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는 보기 드문일인 체 게바라의 머리를 베서 라파스로 보내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하지만 외부에 “야만스럽다”라는 인상을 줘선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그냥 지문을 채취한 뒤 양손을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보존 처리했다.

그리고 이어 그날밤 시신을 비밀리에 치우고 “소각했다”고 발표했다. 이튿날 체의 동생 로베르토 게바라가 형의 신원 확인을 위해 발레그란데로 왔지만 이미 게바라의 시신은 알려지지 않은 곳에 매장된 뒤였다.

하지만 볼리비아 정부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체의 시체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체가 ‘신격화’되고 영생을 얻게되는 ‘혁명의 상징’이 되는데 볼리비아 정부가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생포 당시 체 게바라는 완전히 방치된 사람의 모습으로 옷은 누더기였고 몸은 더럽고 마른데다, 길게 자란 머리칼이 뒤엉킨 한마디로 ‘지저분하고 고리고리한’ 몰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리비아 군부가 언론인들에게 그의 시체를 언론에 공개키로 결정했을 때 그렇게 남루한 모습을 보이면 과연 진짜 체가 맞을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체 게바라의 시체를 세심하게 닦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볼리비아 군부의 꽃단장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 돌아다니는 체 게바라의 초상, 전세계가 알고 있는 그를 다시 만드는 조치였다.

결국 볼리비아 정글에서 굶고 헐벗으며 추격에 쫓기던 기운 잃은 패배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죽인자 들을 태연하게 굽어보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난 것이다. 정글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믿기지 않는 “태연하고 영웅적이며 침착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체의 마지막 모습”은 불과 몇 일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결국 안치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마치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모습에 비견됐고 이는 오늘날까지 체 게바라 신화를 만드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지금도 라틴아메리카 가난한 가정에는 게바라의 사진이 다른 성화들 사이에 걸려있는 사례가 많다는게 체 게바라의 전기작가 슈테판 라렘의 설명이다.

결국 체의 머리를 자르려 고심하고, 손을 잘라 포름알데히드에 넣어 보관한 잔인한 정적들은 역설적으로 체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꾸미려다 체를 신적인 가치를 지닌 영원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잔혹한 죽음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를 얻게 된 인물의 스토리에는 역설적인 역사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참고한 책>

슈테판 라렘, 체 게바라, 심희섭 옮김, 인물과사상사 2007
Eric Hobsbawm, The Age of Extremes- A History of the World 1914-1991, Vintage 1996

☞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영화 '박쥐'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