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외국 친서에 사용"

지금까지 단 한 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된 조선왕조 임금의 친서(親書)에 사용한 실무용 국새(國璽)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오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 국새를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이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이 유물이 바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사라진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국새는 외함은 분실되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었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렸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이들 글자 중 '皇'자는 '白'에 해당하는 부분을 '自'로 썼으며, 이는 "대한제국기 고종시대에 사용된 다른 국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박물관 측은 덧붙였다.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윗단에 국새를 넣었다.

나아가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고궁박물관이 국새 성분을 비파괴 분석한 결과 은(銀)과 금(金) 비율이 거북형 손잡이는 81:18인 반면, 몸체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고종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편지에서 사용한 황제어새로는 두 종류가 확인됐지만 이에 사용한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으며, 그 중 1점이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이 국새가 바로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한 국새는 "그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광무 5년 11월 16일)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됐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가 가짜일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도저히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말했으며, 정종수 고궁박물관장 또한 "이것이 가짜라면 이를 만든 사람은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는 모두 27명에 이르는 임금이 있었으며 이들 임금은 이번 고종황제의 국새처럼 실무용 도장을 무수히 제작해 친서 등에 사용했을 테지만 그런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일제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가 압수한 고종황제의 국새류 중 제고지보(制誥之寶)와 대원수보(大元帥寶), 그리고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3점이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해방 이후에 반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을 뿐이다.

이들 국새류는 명칭으로 보아 황제가 국내의 신민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대를 통수할 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을 실제 사용한 사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일부 기관 등이 소장한 '임금 도장'은 대부분 어보(御寶)라 해서, 그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일 뿐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해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한 국보 지정절차를 밟기로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