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를 찌르며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상큼하다. 추위 탓에 방 안에서 뒹굴다가도 막상 밖으로 나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사람은 움직여야 생기가 도나 보다. 삼청동 박물관 투어를 하게 된 것은 고향에서 올라오신 부모님 덕이었다. 그동안 외식으로 대충 때우고 하다보니 죄송한 마음이 생겼다. 적은 돈으로 알차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던 중 회사에서 '짠순이'로 소문난 선배가 "삼청동 박물관들을 둘러보라"고 귀띔했던게 생각났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간단한 계획을 세운 다음 얼떨결에 끼어든 조카녀석까지 데리고 '한나절 나들이'에 나섰다.

집을 떠난 시간은 오후 1시쯤.목적지는 세계 각국의 장신구가 전시된 세계장신구박물관을 비롯 티베트 유물이 있는 티베트박물관,북촌의 근현대 유물을 볼 수 있는 북촌생활사박물관,다양한 영화와 만화에 나왔던 소품과 장난감을 만날 수 있는 토이키노박물관,아기자기한 부엉이 작품이 있는 부엉이 박물관까지 5곳이다. 종로구가 이들 이색 박물관을 모두 구경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편리했다. 요금은 성인 1만5000원,어린이 1만원.네명분의 표를 사도 웬만한 놀이공원 한명 입장료에 불과하다. 이들 박물관 어느 곳에서든 자유이용권을 살 수 있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티베트박물관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정독도서관 정문 옆으로 난 길로 10m가량 올라가다 왼쪽으로 꺾어드니 파란색의 자그마한 2층 건물이 보인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처럼 큰 건물을 기대하던 가족들이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꿋꿋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분위기는 곧 반전됐다. 티베트 현지에서 직접 공수한 인피 경전,두개골 공양기,넓적다리뼈 나팔 등 이국적인 전시물들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전시품은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출토된 티베트 유물 400여점.넓지 않은 공간이어서 찬찬히 전시품을 살펴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다음 코스는 세계장신구박물관.가는 길에 있는 머플러 가게에서 1만원 짜리 호피무늬 스카프를 샀다. 질감이 백화점에서 파는 것 못지 않다. 세계장신구박물관 앞에 서니 굳게 닫힌 철문이 위압적이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는 관람객들도 여기 저기 보인다. 김승회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가 2004년 보석함 모양의 컨셉트로 건물을 설계해 이처럼 특이한 외양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1971년 브라질에서 시작해 2002년 아르헨티나까지 외교관의 아내로 세계를 돌아다닌 이강원 관장이 수집한 보석들로 가득차 있다. 3층으로 구성된 건물 안에 목걸이,팔찌와 발찌,반지,귀고리와 머리장식 등 2000여종에 이르는 보석과 장신구가 전시돼 있다. 12월 11~31일까지는 '핸드백,마이 러브'라는 주제로 1870년에서 1950년대까지의 유럽,아시아,북미,남미,아프리카 핸드백 80여점을 보여준다.

세번째 목적지인 북촌생활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다들 말수가 적어진 것은 숨이 찬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옛 골목들의 정취와 인왕산의 맑은 기운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어서였다.

북촌생활사박물관은 북촌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한옥이다. 실제 북촌의 한옥마을에서 주로 쓰였던 생활 물건 168점이 전시돼 있다. 모든 물건들에는 '계동 김씨댁''계동 장씨댁''계동 최소아과댁' 등 출처가 적혀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부모님 눈빛이 달라졌다. 숯불 다리미부터 놋쇠 도시락,나무 주걱,털실로 짠 속치마 등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가득차 있어서다. 유자차와 모과차를 만들어보는 체험교실이 이달 14일까지 진행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조카를 위해서 예약을 하고 와도 좋을 뻔했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유기농법으로 키운 유자와 모과를 갖고 직접 차를 담근다.

북촌생활사박물관을 나서니 뒤로 펼쳐진 한옥마을을 배경으로 DSLR 카메라 동호회원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들의 카메라 프레임을 피해 내리막을 따라 가니 부엉이 미술 공예 박물관이 나타났다. 배명희 관장이 중학생 시절부터 30년간 손수 수집해온 2000여점의 부엉이 관련 미술공예품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동전,화장품 용기,핸드백,온도계 등 많은 제품들이 부엉이 모양으로 만들어져 진열돼 있다.

차와 음료가 무료로 제공돼 박물관 가운데에 있는 탁자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자칫 지루할 뻔했던 분위기가 배 관장의 부엉이에 관한 설명으로 활기를 띠었다. 부엉이의 역사,신화,미술,철학 등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졌다.

토이키노박물관은 어린이들이 정신을 빼앗기는 곳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장난감들이 가득하다. 미키마우스,토이스토리,몬스터주식회사 등에 나온 만화 캐릭터부터 슈퍼맨,배트맨,스파이더맨 등 슈퍼 히어로까지 없는게 없다. 손원경 관장이 보유하고 있는 장난감은 10만여종에 이르지만 공간이 부족해 모두 전시하지 못한단다.

박물관 투어를 끝내고 나니 오후 5시가 다 돼간다. 4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수제비집,보리밥집 등 부담없이 식사할 수 있는 음식점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가면 된다. 맛집이 너무 다양해 고르는 데 즐거운 고민을 해야 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