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은 '컨테이너(Container)'와 '콘텐츠(Contents)'로 나뉜다.

컨테이너가 유형자산이라면 콘텐츠는 무형자산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내미는 명함 종이는 컨테이너다.

하지만 같은 직장,같은 직급의 명함이라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다시 말해 머리 속에 든 콘텐츠에 따라 명함의 가치는 크게 달라진다.

베트남에서 생산된 인형을 담은 컨테이너와 한국산 LCD TV로 가득찬 컨테이너의 가치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루이비통의 스테디 셀러 가방 '스피디 30'은 명품치고는 가격(650달러)도 합리적인 편이다.

그러나 도시 여성들이 들고 다니기엔 '2%'가 부족했다.

물건을 넣고 빼기엔 편리하지만 디자인이 단순한 게 문제였다.

해법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내놓았다.

2005년 봄 시즌에 맞춰 루이비통이 선보인 '맨해튼 PM'을 통해서다.

이 가방은 포켓 두개가 나란히 있어 마크 제이콥스의 작품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광고 모델로는 도시적 이미지의 배우 우마 서먼이 기용됐다.

루이비통 특유의 모노그램에 실용적인 디자인이 결합된 맨해튼 PM은 스피디 30보다 훨씬 비싼 가격(1450달러)에도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두 제품은 사실 생산 원가에서 큰 차이가 없다.

맨해튼 PM에 더 들어간 재료가 있다면 몇 개의 금속 정도일 것이다.

루이비통은 그렇다면 무엇을 판 것일까.

바로 '이 가방을 들고 뉴욕의 맨해튼을 걸어도 더 이상 촌스럽지 않고 꿀리지 않는다'는 스토리였다.

새로운 부가가치는 이런 점을 젊은 여성들에게 알릴 수 있는 힘에 있었던 것이다.

노키아의 고가 브랜드인 '버투 어센트(Vertu Ascent)'는 중가폰인 '노키아 550 스포트 뮤직'과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가격은 4500달러로 15배나 비싸다.

소비자들은 외장의 일부를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마감한 버투 어센트에 무려 4200달러를 더 지불했다.

생산원가 차이는 얼마되지 않지만 디자인이 창출한 부가가치는 수천달러에 달했던 셈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선 올림푸스가 제품이 아닌 '추억'을 팔아 초기 디지털카메라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다.

비결은 광고에 있었다.

올림푸스는 처음엔 제품의 기능을 부각시킨 광고를 만들어 내보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소비자들은 제품의 기능보다는 그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추억과 사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지현을 광고모델로 내세워 만든 후속 광고는 이런 측면에서 적중했다.

루이비통,노키아,올림푸스는 모두 가방 휴대폰 디지털카메라라는 '컨테이너'에 스토리 디자인 추억과 같은 '콘텐츠'를 담아 팔았던 것이다.

하드(Hard)는 거의 그대로인데 어떤 소프트(Soft)를 더하느냐에 따른 그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 중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지난 40년간 선진국이 이미 만들어 놓은 '컨테이너'를 따라 만드는 데 급급했던 탓이다.

성과도 물론 없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소니를 따라잡았고,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조선사들도 일본을 압도했다.

한국 수출품 중엔 품질 수준에서 세계 톱 클래스에 도달한 제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비용이 얼마가 들더라도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완벽추구형 소비자(Hedonist & Perfectionist)에게 어필하는 각 분야의 '명품'을 아직까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컨테이너에 매몰돼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지금까지 '무엇이 같은가'라는 물음을 상대해야 했다면 앞으로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달려왔던 길을 맹렬한 기세로 따라오는 중국에 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기존 산업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산업에 주력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1,2,3차 산업에 0.5차를 가미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부가가치를 창출한 예는 많다.

독일 폭스바겐은 드레스덴 공장 외관을 통유리로 마감한 '투명공장'을 아예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조업이라는 2차산업에 관광이라는 3차산업을 가미해 0.5차만큼의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일본 고마츠 계열의 빅렌털도 중장비 소유주의 휴대폰으로 장비의 가동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집중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지 2년 만에 후쿠시마현 제1의 중장비 렌털 회사로 발돋움했다.

소유주가 개인적으로 관리할 경우 40%였던 가동률이 78%까지 높아지자 장비 소유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빅렌털에 관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LG전자 LSR연구소의 이철배 소장은 "원가 혁신,공정 혁신,마케팅 혁신으로 창출할 수 있는 가치의 크기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라며 "우리도 스토리와 디자인을 파는 것처럼 미래의 상징적인 가치(Symbolic Value)를 창출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