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저서 출간 앞두고 하루하루 행복한 집필
산악자전거,스키 등 '잡기' 도입도 선구자
윤형주, 송창식과 함께 통기타시대 이끌어
"나는 행운아" "부모님께 특히 감사드린다"


가수 김세환 씨가 나이 60을 한 해 앞두고 막바지 산고 중이다.

생애 첫 집필 작업이니 당연히 즐거운 산고라고 하겠다.

그의 '옥동자'는 이달 말께 세상에 첫선을 보인다.

이번에 출간되는 저서는 '두 바퀴로 가는 행복'. 이 책은 살아가는 행복을 찾되 노래보다 자전거에서 찾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산악자전거(mtb.mountain bike)의 행복 이야기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mtb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 mtb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 바로 저니까요.

이를테면 산악자전거의 전도사랄까요? 그래서 이 업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하죠. "

김씨의 자전거 사랑은 각별하다.

mtb를 도입한 선구자로서 자부심도 무척 큰 듯하다.

1986년 미국에 스키 타러 갔다가 산악자전거를 타보고 반해 곧바로 분해 후 국내에 도입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는 시간만 나면 애마처럼 자전거를 몰고 산으로, 들로 달려나간다.

서울 인근의 청계산, 우면산은 물론 강원도 태백산맥의 한계령, 미시령 할 것 없이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행복비타민'인 엔도르핀의 신비와 환희를 만끽하면서. 이번 책에는 그 행복 이야기가 실리게 된다.

노래는 차라리 부업으로 여겨질 만큼 김씨가 생활 속에서 즐기는 취미는 다양하다.

스키 역시 자신이 원조라며 김씨는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운다.

스키복도 없고 슬로프도 제대로 없던 시절인 1968년에 강원도 횡계 산골짜기에서 백설의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갔으니 이 역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또 보성고교 2학년 때 동대문축구장 옆의 경찰기마대에서 승마강습을 받았다.

서울 강남이 허허벌판일 때인 1970년대 말에 지금의 르네상스호텔 자리에서 점프연습을 하며 오토바이 경주를 즐겼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 동료연예인 이수만, 이덕화보다 한참 선배격이라며 김씨는 웃는다.

이밖에 카메라면 카메라, 오디오면 오디오, 비디오면 비디오 등 그의 재주와 관심사는 널려 있다.

모두 최소 마니아급이다.

"저는 행운아입니다.

별 고생없이 삶을 사랑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가장 고마우신 분은 저에게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가르쳐주신 아버님과 어머님입니다.

'자유롭고 편하게 살자'는 게 부모님의 주의라면 주의였죠. 고등학교 때 여학생들과 집에서 댄스파티를 열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돌아가신 아버님이 한없이 고맙습니다."

삶의 강물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인생 내내 격랑의 물결을 헤치며 신산스럽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무난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김씨는 이중 후자에 속한다고 할까.

그러나 행복한 삶에 중요한 것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닐까싶다.

격랑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요 속에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외부환경과 내적 자세가 그 사람의 행복지수를 결정한다고 하겠다.

김씨는 행복한 환경을 행복하게 가꿔가는 자세와 지혜를 갖추고 살아왔다.

즉, 행복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1972년 가요계에 데뷔해 무명시절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지금까지 팬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는 몇 안되는 가수다.

늘 웃고 다니는 그에겐 복이 따라다녔고, 그 복은 다시 팬들에게 행복한 추억과 따스한 느낌으로 돌려줬다.

그의 행복 비결 중 하나는 번잡함을 피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단순함의 미학이다.

복잡하고 골치아픈 건 딱 질색. 심각한 것도 싫어한다.

유명가수라면 하나씩 갖고 있는 홈페이지가 없는 이유도, 교회에 가서 간증을 하더라고 남들처럼 요란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적 자아가 하자는 대로 맡겨두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온다고 할까.

그래서 그의 노래는 다소 헐렁해 인생의 심오함이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쉽고 편하게 다가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것 같다.

"인생의 아픔이나 생활의 찌듦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요.

음악(音樂)도 '노래로써 즐겁자'는 뜻이니 그대로 실천하고 있을 뿐이죠. 포부요? 없어요.

아내가 간혹 '당신은 야망이 없다'고 꼬집는데 나는 그때마다 대답합니다.

'그래, 없다.

하지만 대신 즐겁지 않느냐'고요."

본인의 얘기처럼 그는 가수로서도 행운아의 길을 걸어왔다.

MBC라디오의 인기프로그램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돈 포겟 리멤버'를 불러 일약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노래가 전파를 타고 나가자 '김세환 씨가 부른 곡으로 들려달라'는 엽서가 방송사에 쇄도했고, 그의 주가는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얼마 후 윤형주 씨와 서울시민회관에서 '돈 포겟 리멤버'를 부른 게 그의 데뷔무대다.

그동안 작곡 하나 해본 적 없지만 친구들이 작곡해서 준 곡들이 그때마다 히트한 것도 그에겐 홍복이나 다름없었다.

송창식 씨는 '사랑하는 마음'을 줬고, 윤형주 씨는 '길가에 앉아서'를 건넸다.

이장희 씨는 '좋은 걸 어떡해' 등을 선사해 인기가 급상승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1974년에 '사랑하는 마음'이 방송가요순위 1위에 오르면서 그해와 이듬해에 최우수남자가수상, 신인가수상 등 상복이 줄줄이 터졌다.

한국가요계에서 자신만큼 고생 안하고 산 가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이지만 행운만으로 행복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까? 김씨는 꾸준한 인기의 비결로 분명한 캐릭터와 꼼꼼한 자기관리를 꼽았다.

통기타 세대의 대표주자로서 포크송을 일관되게 지켜옴으로써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해준 7080세대와 호흡을 함께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그 충실한 이미지로 허튼짓 하지 않고 꾸준히 무대에 오른 덕분에 오늘의 자신 있는 것 같다는 뜻이다.

본인이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주어진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 자신의 행복으로 변환시켜가는 영특함도 김씨의 오늘을 일궈온 열쇠가 아닐까싶다.

어떤 곡이든지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리메이크'라는 재창조 과정을 거쳐 본인의 노래로 소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특유의 색깔과 향기가 있다.

이와 함께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그저 고맙다니까'를 입에 달고 다닐 만큼 겸손한 것도 장수비결로 하나 더 꼽을 만하다.

김씨를 언급할 때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송창식 씨와 윤형주 씨. 동갑내기인 이들은 김씨보다 한 살 더 많으나 오랜 지기지우로 가까이 지낸다.

생활패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노래풍이 다르지만 무대에서만은 박자 궁합이 척척 잘도 맞는다.

이들 빅쓰리가 자주 무대에 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특히 1980년대 말 KBS의 '노래는 내친구'라는 프로그램에서 공동진행을 맡으면서 더 가까워졌어요.

셋의 화음을 모은 앨범 '하나의 결이 되어'도 냈구요.

디너쇼를 하면, 내가 먼저 '돈 포겟 리멤버'로 분위기를 잡고 나서 윤형주와 송창식이 차례로 나오는 식이지요.

송창식은 낮에 자고, 나는 밤에 자는 관계로 평소에 서로 만나기가 힘들지만 다른 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같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들 빅쓰리는 명동의 명소였던 '오비스 캐빈'의 핵심 멤버였다.

1층이 경양식집이고, 2층과 3층이 각각 통기타와 그룹사운드 공연장이었던 오비스 캐빈은 70-80년대에 고교 졸업생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했던 젊은이 문화의 명소. 이장희ㆍ조동진ㆍ양희은 등이 지나갔던 통기타 음악의 산실이었다.

김씨는 "통기타 열풍이 워낙 거세어 송대관 형이 '느그덜이 없었으면 내가 10년은 더 빨리 인기를 얻었을 거여'라고 푸념할 정도였다"며 웃는다.

그는 요즘도 기회 있을 때마다 무대에 설 만큼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다.

올해의 경우 3월 중순에 윤형주, 최백호, 남궁옥분과 힘께 미국 4개 도시 순회공연을 할 예정이고 그동안 뜸했던 신곡도 발표해볼 생각이다.

물론 이달 말에는 정혜인 작가와 함께 '두 바퀴로 가는 행복'을 출간해 처음으로 저서를 가져본다는 설렘도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해마다 4월과 5월, 10월과 12월에 윤형주-송창식-김세환 빅쓰리는 합동공연으로 바삐 불려다닌다.

그리고 공연이 비교적 뜸한 계절에는 '세월회' 멤버들과 병원, 양로원 들으로 자선공연을 나선다.

세월회는 최백호, 남궁옥분, 최성수, 4월과5월, 김범룡, 양화영 등이 만들 단체로 한 달에 한 번씩(모임일은 세 번째 월요일) 좋은 일 해보자며 만들었다.

이밖에 자신의 거처가 있는 서초구유명인봉사회와 로터리클럽 모임에도 나간다고.
후배들의 음악을 듣고 조언해줄 게 없느냐고 묻자 김씨는 그들에게서 배울 게 더 많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유행가는 어차피 시대의 음악인데 후배들의 노래도 이 시대를 표현하는 감성으로 얼마든지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음악이 소중한 만큼 후배들도 그들의 음악을 존중받아야 하고 그들 역시 또다른 후배의 세계를 존중해주면 된단다.

"어느 가수나 팬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갑니다.

자신의 음악이 있는 한 팬들이 있고, 거꾸로 그 팬들이 있는 한 우리의 노래도 살아 있다는 거죠. 한 시절에 유행한 음악을 통해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쉽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후배들도 자신만의 캐릭터를 잘 살리고 자기관리를 충실히 하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죠."

그는 아내 이현숙 씨와 아들 기범 씨, 딸 도연 씨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줬던 그대로 해주고 있다고 한다.

삶의 주인이 돼어 스스로 책임지고 자유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기범 씨는 미국 유학 후 지난해 군복무를 마치고 지금은 일본어 연수 중이고, 도연 씨는 중앙대에서 바순 악기를 공부해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음악의 길을 가고 있다.

"자식은 부모 하는 대로 자란다고 봐요.

부모 인생을 복사하는 것이죠.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게 돼 있어요.

요즘으로 치면 배우 배용준처럼 인기가 높았던 아버님도 우리와 함께 집안일을 하나하나 챙기시면서 몸으로 가르치셨던 것처럼요.

자식들 앞에서 부모님이 싸우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자유롭게 풀어주면 알아서 잘 크는 것이 자식이라고 봐요.

나도 애들의 눈높이에 맞춰 사는데, 예를 들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더라도 아이들 좋아하는 음악을 틀지요."

연예인 아들로 서울대에 합격한 것은 김씨의 큰형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고시까지 붙어 부모에게 보람을 안겼다.

둘째 형은 한양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현재 그 길을 가고 있다.

어머니 홍순지 여사는 올해 90세로 건강하시다고.

그런 그에게 지난해 아버지의 타계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영결식 때는 은퇴공연작 '이성계의 부동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노래 '그대 배우 되어'가 흘러나와 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장례위원장으로서 예술원을 찾은 영구차에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던 연극인 차범석 씨도 20여일 뒤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 연극사가 마감되는 순간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이에 앞서 은퇴공연에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씨 등 전직 대통령이 참석해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데뷔 35년을 기념해 특별히 계획해둔 이벤트 같은 게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면서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자신으로서 데뷔 몇 주년이라고 따로 챙기는 건 성격상 맞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그의 행복론을 물어봤다.

"행복은 바로 자기자신에 달려 있다고 봐요.

그때 그때의 느낌이죠. 내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겠죠. 나는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고 싶어요.

기가 막힌 직업이어서죠. 인기가수는 인공위성에 비유할 수 있죠. '무명'의 연료를 불태워 '인기'라는 대기권 위로 떠오르면 그 다음은 쉽게 돈도 벌고, 기쁨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 직업, 아주 재미있는 직업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