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입원복 차림의 환자들이 병원 경내를 자유롭게 산책한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7~8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가 하면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서 낮잠을 즐기는 환자도 있다.

축구장만한 잔디밭 한쪽에선 정자 하나를 혼자 차지한 채 고요를 즐기는 '고독파'도 눈에 띈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표교리의 성안드레아신경정신병원의 한여름 낮 풍경이다.

정신병원이 어떻게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1990년 문을 연 이 병원은 폐쇄적 구조와 인신 구속,억압,인권유린 등을 떠올리게 하는 여느 정신병원과 달리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병실에는 창살을 없애는 대신 특수 유리창을 설치했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반(半)개방병동,개방병동을 운영해 환자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개방병동 환자들은 자유롭게 산책도 하고 필요하면 병원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있다.

환자를 돌보려면 다른 병원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 병원을 설립ㆍ운영하고 있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수도자들에겐 그 자체가 '도를 닦는' 일이다.

이천 시내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면 삿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김대건 신부의 흰색 동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병원 이름의 안드레아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 신부의 세례명이다.

그러나 지하 1층~지상 5층의 병원 건물에는 병원 이름이 없다. 환자들이 '정신병원'이라는 간판을 보고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병원 오른편 산쪽으로는 잔디가 깔린 운동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주변 숲속에는 십자가를 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회복해야 환자와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절제의 미덕을 지향하기보다는 소유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소유하게 되면서 오히려 영적 황폐함과 정신적 공허를 초래하고 있지요.

상처받은 영혼을 어떻게 어루만지고 치유해야 할지 그 길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그 방향인 것은 분명합니다."

병원장 양운기 수사(46)의 설명이다.

그는 "19세기에 정신과가 하나의 진료과목으로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악령이 들렸다'면서 수도원으로 데려갔고 수도원이 정신치료를 맡았다"면서 "수도원이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억압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1953년 무아(無我) 방유룡 신부(1900~1984)가 설립한 최초의 방인(邦人) 남자수도회다.

대부분의 수도회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것과 달리 한국인이 세운 토종 수도회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복음정신을 찾아내 전하고 그들을 따르자는 것이 설립 취지다.

수도회 전체 회원이 80여명,성안드레아병원이 있는 이천 분원에는 9명이 산다.

이미 1946년 개성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했던 방 신부는 점성(點性),침묵,대월(對越)을 통한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영성의 뼈대로 삼았으니 영성의 개념조차 한국적이다.

점성이란 하느님 안에 늘 깨어 있으면서 매 순간을 빈틈없이 성화(聖化)하는 것,침묵은 하느님을 향해 하느님 안에서 자아를 철저히 비워 없애는 일체의 내적ㆍ외적 행위다.

이렇게 점성과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 대월이며,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 밀떡의 형상 안에 자신을 담아 모든 이들에게 온전히 내준 것처럼 자신을 완전히 비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면형무아라고 양 수사는 설명한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빵에 담아 제자들에게 나눠 준 것처럼 자기를 비워 무아가 돼야 남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들,삶의 아픔과 흔적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고독한 시간을 갖고 내면을 들여다 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병원 건물 오른 편 숲속에는 성당과 수도원이 있다.

60여평 규모의 단층건물인 성당은 하늘 높이 첨탑을 세운 여느 성당과 달리 나지막하다.

성당 내부 전면은 유리로 벽을 삼아 개방된 느낌을 준다.

아침기도와 미사를 함께 드리는 환자들을 고려한 설계다.

성당 맞은 편 언덕 위에는 현대적 양식의 3층짜리 수도원 건물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봉쇄구역이지만 특별히 '관람'이 허락됐다.

1층은 수도자들의 거실과 식당,2~3층은 방이다.

2평반 남짓한 수도자들의 방은 여느 독신자 기숙사나 다를 바 없지만 수도자들에겐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봉쇄구역이란 단순히 사람들이 출입을 막는 곳이 아니라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기 위한 장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극기하는 곳이지요.

그러므로 봉쇄구역은 수도자들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만나는 자기만의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봉쇄구역을 보여주던 양 수사의 설명이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하느님과 만나는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1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정성과 힘이 이 봉쇄구역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이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