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탈북자중 처음으로 정치적 망명을 받아준 서재석 씨는 "아들이 남한 학교에서 탈북자 자녀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자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에게 같은 민족인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남과 북이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며,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서 떠안아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로까지 여긴다.

오죽하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청소년들이 점점 많아질까.

이런 상황에서 차승원이 탈북 청년의 가슴 아픈 사랑을 연기했다.

4일 개봉하는 영화 '국경의 남쪽'(감독 안판석, 제작 싸이더스FNH)에서 그는 북에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탈출해 남에서 또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평범한 한 남자 김선호로 출연했다.

영화 '국경의 남쪽'은 탈북자도 사람이라는 것, 북한에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애타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큼성큼 영화배우로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차승원은 사랑의 기쁨과 운명으로 뒤엉켜버린 이별의 슬픔을 풍성한 연기로 담아냈다.

그의 진정성 담긴 연기는 다소 아쉬운 극적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스스로 발화한다.

첫 멜로 연기에서 진폭이 큰 감정을 연기한 차승원은 "(감독이) 날 그냥 놔둬 편하게 연기했다"고 말했다.

◇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멜로 영화

"멜로 영화는 대부분 판타지로 이끌어갑니다.

죽음이라는, 결코 흔치않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거죠.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니었어요.

그냥 현실에 있을 법한 그대로 찍는 게 옳은 것 같다는 감독님의 주장이었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인민해방전쟁의 영웅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남한에 살아계신 바람에 선호네 가족은 긴박한 탈출을 해야 한다.

선호는 발걸음이 무겁다.

결혼을 약속한 연화(조이진) 때문. 연화네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마련한 돈을 사기꾼에게 모두 날린데다 연화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선호의 삶은 허망하기만 하다.

그런 그 앞에 경주(심혜진)의 따뜻한 보살핌은 결혼에까지 이르게 한다.

안정적으로 남한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선호 앞에 오직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역시 북한을 탈출한 연화가 나타난다.

운명이 야속하기만 한 애처로운 연인은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만약 이 이야기가 북한 사람중 특수부대 장교라든지 하는 특수한 계층을 다뤘으면 안했을 겁니다.

전혀 다른 삶인데 왜 이리 나와 비슷해 보이는 게 많은지. 이야기 자체가 날 설득시켰기 때문에 선택했죠."
히트 드라마를 수없이 만들었던 안판석 감독은 차승원이 자신의 연기 영역을 확장해가도록 내버려뒀다.

"모든 시나리오가, 또는 시나리오의 모든 장면이 날 설득시킬 수는 없죠. 감독님이 날 굉장히 자유롭게 풀어놔두셨어요.

난 약간은 방임형 배우인지라 느낀 그대로, 있는 그대로 찍을 수 있게 도와주셨기에 만족할 영화가 됐습니다."

감독과 배우의 매끄러운 소통은 연화를 남에서 다시 만났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른채 담뱃불을 침으로 애써 끄려하고, 숱한 감정이 배어있는 눈빛으로 연화의 사진을 보는 선호로 표현됐을 것.
그는 "분단이 족쇄인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풀어가지 않고 멀리서 카메라를 비춰 '그냥 지켜보자'는 듯 촬영했기에 관객이 관망하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보이게 됐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 "다행히 관객이 나의 선택을 믿어주고 있다"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웰컴 투 동막골' 까지 한국 영화 흥행사에서 북한은 주요 주제와 소재로 다뤄져왔다.

뭔가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국경의 남쪽'은 바로 지금 내 옆에서 일어나는 듯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바로 그 점에서 관객이 불편해한다면?

"다행인지 내가 재미있어 하는 걸 대중들이 공감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실 '혈의 누'나 '박수칠 때 떠나라' 같은 경우 더 모험이었죠. 그런데 차승원이라는 배우에 대한 믿음으로 많은 분들이 선택해주셨습니다.

그 두 영화보다 훨씬 더 공감의 가능성이 높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차승원이 나오면 어쨌든 재미있다'는 믿음은 한두 편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 그가 고민했을 시간들이 짐작된다.

이제 그는 슬슬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저는 주로 철저한 기획 영화에 출연해왔습니다.

차승원에게 캐릭터를 맞췄거나, 캐릭터에 차승원을 맞췄다고 볼 만큼 캐릭터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였죠.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이 배우가 뭘할 지 궁금증을 느끼게 하고, TV 등에서 볼 수 없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하는 배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연기 폭이 넓은 배우보다는 깊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한 개인이 얼마나 넓어질 수 있겠습니까.

몇 년 뒤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할 지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있게 연기할 수 있어야겠죠."
차승원은 성실한 배우다.

연기도, 대중과의 만남도 성실하게 임한다.

언제부터인지 후배들이 '닮고 싶은 선배'로 꼽는 배우가 됐다.

그런 그가 영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늘 같다.

"감동과 웃음을 주고 싶다"는 것.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