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백년의 고독'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77)의 최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민음사)이 번역돼 나왔다.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겪은 파란많은 역사의 리얼리티와 원시 토착신화의 마술같은 상상력을 결합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예술 미학을 일구어낸 작가다. 그의 독창적인 서사 기법이 발휘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지난해 발간되자 마자 스페인과 중남미권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소설은 '사랑과 다른 악마들' 이후 10년만에 발표한 신작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소설은 90세의 노인과 14세 창녀의 사랑이라는 파격적 소재를 다뤘다. 90세 노인은 '서글픈 언덕'이라는 별명 외에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인물로 '라 파스 신문'의 기자로 칼럼을 써왔고, 스페인어와 라틴어 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노인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사창가 최고의 창녀 카스토리나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운 뒤로는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에게 늘 돈을 주었다. 그는 성적 매력이 넘치던 히메나 오르티스와 결혼할 뻔 했지만 밤의 여인들만이 줄 수 있는 자유와 너그러움을 포기할 수 없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창녀들과 더불어 지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단추공장에서 일하던 가난한 하층민 노동자다. 한때 사창가에서 최고의 포주로 이름을 떨쳤던 로사 카바르카스는 자기네 잡화 가게에 들르는 소녀들 중에서 '쓸만한 아이'들을 골라 창녀로 만드는 인물. 그녀가 옛 단골이던 노인을 위해 고른 소녀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90세 노인은 새롭게 만난 14세 소녀를 잠자리에서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 대신 소녀에게 노래를 불러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땀을 닦아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소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 깊어질 수록 자신의 늙음과 목전의 죽음이 더욱 선명해진다. 소녀를 사랑한 뒤로 노인의 비판적인 정치칼럼은 연애편지가 된다. 그동안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예술적 취미도 바뀐다. 그는 나머지 삶을 소녀를 사랑하는 일에 온전히 바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러면서 노인은 소녀와의 사랑이 현실이 되기보다 영원히 꿈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는 어눌하고 수줍어하는 여린 소년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왔고, 사창가의 난봉꾼으로 살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었다. 그러던 그가 늙음과 소외와 죽음에 이르는 삶의 끝자락에서 한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마르케스는 20년 전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잠자는 미녀의 집'을 읽고 이 소설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도 노인과 소녀의 성과 사랑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작가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자유파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에서 정치칼럼을 썼던 경험, 콜롬비아 바랑키야에서 '동굴 그룹' 화가들과 어울리거나 창녀들과 더불어 살았던 경험 등이 녹아 있다. 소설에는 당시 함께 어울렸던 예술가들의 실명이 자주 언급돼 허구인지 실화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작가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소재를 낭만적 러브스토리로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저속하고 비루한 것들에 굴복하지 않고 삶의 자존과 위엄을 지켜내는 주인공을 통해 마지막 남은 단 하루까지 살아있는 것 자체를 예찬한다. 송병선 옮김. 172쪽. 9천원.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