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刊)는 시인 나희덕(37)씨가 현장감각으로 길어올린 시 산문집이다. 정현종, 김지하씨 등 시인 10명의 작품을 들여다본 글 10편과 시 미학을 조명한 에세이 10편 등 모두 20편의 글이 실렸다. 시인은 1994년 겨울 라디오 뉴스에서 문익환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았다가 고인이 생전 신고 다녔다는 닳아 해진 구두 한켤레를 본다. 그리고 고인이 맞섰던 억압과 시련의 역사를 떠올린다. 고인의 구두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그때 빈센트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 '낡은 구두'를 둘러싼 하이데거와 샤피로, 데리다의 논쟁이 시인의 뇌리를 스친다. 하이데거는 구두의 주인 보다는 낡은 구두가 드러내주는 바깥의 시선, 혹은 그림 한장이 인간존재의 근원을 드러내주는 방식에 주목했다. 예술의 본연을 재현의 관점에서 바라본 샤피로가 이에 반박하자, 데리다는 둘을 싸잡아 비판하면서, 절대적 진리는 없고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보랏빛 입장'을 취한다. 빨강과 파랑을 섞은 보라색 빛이 '균형 감각'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이다. 시인은 문익환 목사의 낡은 구두에 대해 서정주의 '신발'(궤적)을 대비한다. 그가 보기에 서정주의 신발은 자신이 밟았던 길을 미학적으로 끊임없이 지우고 또 지우며, 그럼으로써 '부끄러운 반점'이 묽어지면서 은밀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역설의 그것이었다. 때문에 시인은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서정주의 부끄러운 행적이 다 가려질 수 없는 것처럼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으로 그의 성취를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중간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표제로 쓰여진 '보랏빛'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이밖에 근대 이후의 시에서 '풍경'이 발견되는 과정을 소상히 짚었고 여성시인들의 시 분석을 통해 여성의 몸이 지닌 생래적인 생태적 성격을 드러냈으며 김수영의 시를 통해 전통의 진정성을 찾고자 했다. 정현종, 김지하, 강은교, 고정희, 김혜순, 장정일, 김기택, 최두석, 이홍섭, 장철문 등의 시가 분석됐다. 314쪽. 8천500원.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sh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