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커다란 오방색 보자기를 살포시 덮어 놓은 것 같다. 시선이 닿는 데까지 어우렁 더우렁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 그 언덕마다 한가득 여름작물의 이파리며 꽃이 예쁘게도 어울렸다. 밀과 감자, 비트와 해바라기 등이 서로 다른 색깔로 이웃해 자라는 너른 밭의 경계는 뚜렷한데, 어느 한 부분 튀어 드러나지 않고 조화를 이룬 모양새가 꾸밈없이 자연스럽다. 긴팔 셔츠를 입어도 덥지 않은 기온, 온 땅 가득 내리 앉는 화사한 햇살, 기분 좋은 산들바람에 실린 젊은 여인들의 웃음과 여기저기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맘 먹고 붓을 들어 그린 전원 풍경화가 이보다 더 싱그럽고 평화로울수 있을까. 일본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후라노로 이어지는 길 중간의 비에이. 30여년 전 일본의 사진작가 마에다 신조의 작품으로 더 유명해진 '언덕의 고장'이다. 여인의 봉긋한 가슴선을 연상케 하는 언덕은 조각천을 이어붙여 만든 패치워크 처럼 보인다. 하얀 꽃의 감자밭 옆으로 초록잎새가 바닥에 깔린 비트밭이 이어지고, 누런 대롱의 밀밭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특한 농촌마을 풍경을 그려낸다. 고개를 꼿꼿이 세운 해바라기밭의 샛노란 색깔은 사뭇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밭과 밭의 경계에 서 있는 한두 그루의 나무가 그 풍광에 더욱 강한 액센트를 준다. 그래서 CF나 포스터 촬영장소로 선호돼 이제는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경치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곳이 마일드 세븐 언덕. 감자 비트 밀로 가지런히 덮인 언덕 위의 나무와 그 나무 끝에 걸린 구름 한점. 유키 구라모토나 나카무라 유리코 등 일본 뉴에이지 뮤지션의 담백하고 평화로운 선율이 절로 떠오른다. 세븐스타 나무로 불리는 한그루 떡갈나무가 있는 곳의 밀밭은 관상용 양귀비의 붉은꽃과 어울려 묘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이들 언덕의 모습은 매년 달라진다. 장성에서 땅심을 돋우기 위해 이른 봄 논에 자운영을 심듯이, 이곳에선 해바라기를 식용이 아니라 다른 작물을 위한 밑거름용으로 갈아엎는다. 밀을 심은 곳은 감자를 뿌리고, 감자가 자란 땅에는 비트를 키우는 식으로 해마다 밭을 돌아가며 농사를 짓는단다. 이 지역 언덕은 1년이란 시차를 두고 살아움직이는 거대한 패치워크 작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다. 비에이의 언덕이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면, 후라노의 풍경은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다. 비에이에서 30∼40분 거리인 후라노의 상징은 보랏빛 라벤더. '꽃과 사람의 길'로도 불리는 길에서 만나는 전망공원 앞 꽃밭부터 마음을 흥분시킨다. 그러나 이들 전망공원의 라벤더는 맛보기. 도미타농원이 라벤더의 중심무대다. 25㏊의 농원땅 절반을 장식하고 있는 라벤더의 보랏빛 꽃과 향이 넋을 놓게 만든다. 피고 또 지는 20여종의 다른 꽃들도 라벤더 풍광을 예쁘게 장식한다. 농원 한쪽에 서로 다른 색상의 융단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듯 꾸며놓은 이도로리화원의 풍경이 압권이다. 원래는 이 지역 다른 농지처럼 감자 등을 심은 땅이었다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밭에서 키운 라벤더는 농산물로 출하했었다. 유럽의 라벤더가 수입되면서 라벤더 농사는 접어야 할 처지가 됐다. 우연이 운명을 갈랐다. 일본정부의 신년달력에 이곳의 만개한 라벤더 사진이 실렸고 이를 본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몰렸다. 입소문을 들은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1976년께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용 라벤더밭을 일구기 시작, 지금은 연간 1백20만명이 들려가는 명소가 됐다. 그만하면 입장료와 주차료 수입이 만만치 않을텐데도 '전부 무료'를 고수하고 있다. 대신 라벤더와 다른 꽃을 이용해 만든 제품을 판매해 농원 운영비용을 충당한다. 도미타 히토시 대표(41)는 "더 많은 사람이 라벤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학교 때부터 농삿일을 도와 2대째 농원을 가꾸고 있는 도미타 대표. 그의 검게 탄 얼굴에 순박한 농부의 맘씨가 배어난다.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비에이의 언덕, 후라노의 하늘 가득한 라벤더 향기. 그 아름다운 자연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 < 여행수첩 > 홋카이도는 일본열도 최북단의 큰 섬이다. 경상북도를 제외한 남한 크기의 땅에 6백만명이 살고 있다. 도청 소재지는 삿포로. 6개의 국립공원, 5개의 국정공원, 12개의 도립공원 등 때묻지 않은 자연경관이 자랑이다. 한여름인 8월 평균기온은 삿포로 기준 섭씨 22도. 아침 저녁으로는 초가을처럼 서늘한데다 장마가 없어 습하지도 않아 피서여행지로 제격이다. 미소(된장) 소유(간장) 시오(소금)로 국물맛을 낸 '라멘', 등껍질 속의 내장맛을 최고로 치는 털게를 포함한 게, 신선한 우유를 재료로 갖가지 맛을 낸 아이스크림과 회ㆍ해산물 요리가 일품 먹거리로 꼽힌다. 대한항공이 인천~삿포로(신치토세공항) 노선에 단독 취항하고 있다. 매주 일ㆍ월ㆍ수ㆍ목ㆍ금 5회 직항편을 띄운다. 비행시간은 2시간30분. 삿포로에서도 정중앙부의 거점도시이며 홋카이도 제2의 도시인 아사히카와까지 버스로 2시간 걸린다.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JR특급으로는 1시간30분 길. 홋카이도 전지역의 열차를 탈 수 있는 JR 홋카이도 레일패스(3일권 1만4천엔)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아사히카와에서 비에이, 후라노행 철도와 버스를 이용한다. 렌트카는 승용차 기준 24시간에 5천5백~2만2천5백엔. 여름이면 전세기가 많은 편이다. 지난해까지는 인천~삿포로간 전세기뿐이었는데 올해엔 인천~아사히카와 전세기도 편성되는 등 삿포로 노보리베츠 하코다테 등지에 한정됐던 홋카이도 여행이 아사히카와 소운쿄 비에이 후라노지역으로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하나투어(1577-1212), 국제이벤트투어(02-720-1258) 등이 이 전세기를 이용한 패키지상품을 판매중이다. 일본국제관광진흥회 (02)732-7530, www.jnto.go.jp. 홋카이도 도북(道北)지역 여행안내 ICC (02)737-1122 비에이ㆍ후라노=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