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라는 공간은 고구려와 발해가 흥망성쇠했던 땅이자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로서 역사적 측면에서나 민족 정서적인 측면에서 한국민에게는 매우 특별한 땅이다. 그러나 만주는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반세기 이상 철저히 우리와 단절돼 있었다. 중국 옌볜 화룡시에서 태어나 자란 류연산(46)씨가 1994년부터 4년간 만주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기억의 아득한 뒤편에 묻힌 땅 만주의 역사와 문화를 충실히 기록, 복원한 「만주 아리랑」(돌베게 刊)을 출간했다. 타국땅 만주에서 곤고하고 신산한 근현대를 살아야했던 우리 민족의 특수한 역사적 질곡,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지금의 재중동포들의 살림살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만주, 조선족 보고서'. 옌볜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장이자 옌볜작가협회 이사인 저자는 머리말에서 "중국 조선족 일원이자 문화인으로서 만주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역사의 참모습을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혀두었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 이주민들이 자리잡은 두만강 북쪽 북간도의 용정(龍井). 오랑캐땅이라고 멸시됐던 이곳에 1877년 회령의 김언삼, 장인석, 박윤언 등 14호(戶)가 '오랑캐령'을 넘어 도착했다.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타국땅으로 가야했던 것. 용정이 용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곳에서 발해인들이 팠다는 우물이 발견되고 부터. 1866년 한족이 이 우물을 발견하고 용두레를 비끄러맨 뒤로 이 한인촌을 용두레촌, 한자로 용정(龍井)촌 이라 불렀다는 것. 회령의 이주민들이 첫 발을 디뎠을 당시 백수가 우글거리던 숲이었던 이곳은 이주민들의 노동에 힘입어 지금은 큰 도시로 거듭나 있다. 만주의 전설적인 벼농사 대부인 한인 황룡세(黃龍世.1990~1943). 그는 만주일대의 수전(水田) 개발에 나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하(渾河)까지의 수십리에 봇도랑을 내야했으나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군벌 장쭤린(張作林)측에 '청구서'를 보냈으나 그 제안은 곧바로 뭉개졌다. 황룡세는 그러나 수리국장의 집 앞에 드러누워 데모를 했고 "공사가 실패하면 죽음을 달게받는다"는 약속 끝에 허락받아 일대황무지를 옥토로 바꾼다. 황룡세는 1916년 중화제국 총통인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군벌간 싸움이 벌어지자 장쭤린에게 군량미를 보내 환심을 샀으며, 그후로 그의 아들 쉐량(學良)과 형제결의를 맺기에 이른다. 민족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소로 불리던 명동학교는 1908년 용정의 서전서숙(瑞甸書塾)이 폐교된 후 사생들이 김약연(金躍淵.1868~1942)을 찾아와 설립한 학교. 설립당시 이름은 명동서숙(明東書塾). 민족독립운동가 이동휘가 강의했던 명동학교는 1925년 폐교될 때까지 영화인 나운규, 시인 윤동주, 혁명가 김광진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 명실공히 반일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저자는 반쪽역사에 묻혀 잊혀진 독립운동가와 그 후예들도 발굴해낸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해 싸우다 최후를 마친 김규식 장군의 딸 김현태 여사. 흔해 빠진 흑백 TV조차 없던 김 여사의 곤궁한 집. 김 여사 모자는 넝마주의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의 딸 김산조 여사도 노동자인 딸.사위 부부와 함께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나마 김현태 여사보다 사정이 나은 것은 김산조 여사의 경우, '광복 50주년기념 95 세계 한민족 축전'에 딸과 함께 초청돼 방한한 정도. 나아가 저자는 '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를 지은 '선구자'의 작사자 조두남의 친일의혹을 추적하고 만주군관 학교를 다닌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파헤친다. 박정희는 1939년 북간도로 건너가 '간도조선인특별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1937년에 설립된 이 특설부대는 만주 동북지역의 항일무장세력을 소멸시켜 일본제국주의와 침략전쟁을 지원할 목적으로 동북항일연군과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일삼았다. 이 책이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선조들의 고난사를 넘어 광복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증언을 생생히 들려주는데 있다. "먹는 것은 쥐가 소금 녹이듯 하면서도 일은 소처럼 했다.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일에 내몰렸고 저녁식사 후면 또 마라톤 회의를 했다. 운명을 앞둔 노인을 회의장으로 업어오라고 해서 회의장이 조문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한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집단주의 토지정책인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에 내몰려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10여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의 격랑 속에서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이에 견디다 못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간 숫자도 많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족과 소수민족 간 민족통합의 추세를 비롯 민족보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개방과 함께 몰려온 한국인들과 조선족 사이의 불신, 탈북자 문제 등 만주의 문제가 야기하는 현실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의 불신은 조선족 여성을 끼고 노래방을 들락거리는 한국인 유학생, 여러명의 현지처를 두고 놀아나는 한국인 사업가, 결국에는 피눈물만 흘리고 마는 '이룰 수 없는 코리안 드림' 등으로 더욱 골이 패었다. 저자는 '코리안 드림'을 위해 위장결혼을 감행하는 조선족 여성에 대해 진심으로 고언한다. "결혼이란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의 결합이다. 결혼은 돈벌이 수단일 수 없거니와 남녀가 만나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위장결혼은 여자의 경우 내 돈 주고 내 남편과 이혼하고 가짜 남편을 사는 것이요, 남자의 경우 내 돈 주고 내 아내를 주는 것이다" 256쪽. 9천800원.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hanarmdr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