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가 끝났다.


뭐가 뭔지 모를 정도의 이합(離合)과 집산(集散)으로 어지러웠던 분위기가 정상을 되찾고 있다.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된 이에게는 축하를,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위로를 해야할 일이다.


이제는 미래를 도모하는 데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


우리가 넘어야할 "21세기의 언덕"이 결코 녹록치 않은 형세로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을 오른다.


백두산 다음으로 높은 민족의 영산에 들어선다.


산의 이름이 붙여진대로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안을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발을 내딛는다.


영실 산행로를 택한다.


영실은 한라산 산행로 중에서 제일 짧으면서도 경관이 빼어난 코스.


땀을 흘려 마침내 얻는 성취감을 진하게 느낄수 있는 산오름길이기도 하다.


해발 1천2백80m 지점의 휴게소.


간밤에 내린 겨울비에 한번 더 걸러진 공기로 인해 가슴 깊은 속까지 시원하다.


여느 산행로와 마찬가지로 처음은 쉽다.


현무암 자갈을 깔아 정비해 놓은 좁은 산행길의 양옆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와 그 아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한 키작은 산죽이 한라의 기백을 얘기하는 것 같다.


산림청 주관의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1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숲 부문 우수상을 받은 곳이라고 한다.


한 구비 두 구비 돌아서면서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저 높이 병풍바위를 향해 왼편으로 뻗어 있는 길이 내내 오르막이다.


숨이 곧 턱까지 차오른다.


뻔하게 보이는 길이지만 죽 펼쳐진 병풍바위의 위용 때문인지 발을 내디딜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발 1천5백m 지점에서 한번 돌아선다.


아무 것도 시선을 가로막지 않는다.


멀리 산방산과 이름 모를 오름들의 윤곽이 뚜렷하다.


그 너머 장쾌하게 펼쳐진 바다까지 한눈에 잡힌다.


병풍바위쪽 깊게 패인 계곡엔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솟아 있다.


"오백나한""오백장군"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영실기암이다.


영실기암에는 슬픈 전설이 전한다.


옛날 5백명의 아들을 둔 몸집 큰 할머니가 살았다.


어느해인가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자 아들들은 모두 식량을 구하러 길을 나섰다.


돌아올 아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던 할머니는 그만 잘못해 솥에 빠져 죽었고,빈손으로 돌아온 아들들은 죽을 먹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아들들은 그자리에서 돌이 되었으며,막내 아들은 차귀섬으로 가 울다가 장군바위가 되었다는 것.


영실기암은 그래서 4백99개라고 한다.


봄이면 영실기암 사이에 붉은 철쭉이 피는 데 바로 아들들이 흘리는 회한의 피눈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산행을 시작해 1시간이 조금 넘었을 즈음,"개봉박두"를 말하는 듯 한 어두컴컴한 구상나무 터널을 지나자 또다른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한 윗세오름(구름 위 세개의 오름)초원지대다.


봄을 준비하는 철쭉,누렇게 빛바랜 키작은 억새,그 사이사이 산죽으로 가득하다.


앞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검은 색의 백록담 분화구가 위용을 뽐낸다.


한겨울 1천7백m 고지인데도 그리 춥지 않다.


녹담만설(鹿潭滿雪)이 되어도 그럴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진 경관이 추위를 잊게할테니까.


노루샘에서의 물 한모금으로 산행길의 열기를 식히고,1백m 앞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발길을 돌린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는 자연휴식년제로 출입금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뜀박질 하는 어린 아이들이 즐거워 보인다.


우리 모두의 21세기 모습도 그러했으면 바랄게 없겠다.


힘이 드는 오름길 끝 평탄한 고지에서의 여유로움을 나누는 한라산 영실산행길 처럼.


제주=글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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