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에 맞으면 즉시 나서서 따르고, 부르면 나아가고 또한 되돌아오기도 하건만 쉽게 닳아 더러워질까 두려우니 차라리 신중과 고요를 간직하고 입언(立言)을 닦으리라.'(퇴계집) 조선의 선비들은 출처지의(出處之義)에 엄격했다.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면 벼슬길에 나서 백성을 위하고, 이상에 어긋나면 미련없이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의롭지 않은 부귀영화를 좆기보다 향리의 자연속에서 마주하는 한끼 거친 밥과 물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담양은 그런 선비들의 대쪽정신과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고장중 하나.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미암 유희춘을 비롯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등 조선 중기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낙향해 터를 잡고 교류하던 곳이다. 한국문학의 토대가 된 가사문학을 탄생시키기도 한 이들 교류의 중심무대는 원림(園林)과 정자. 그 속에 들어앉아 치열했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자연 그대로를 경물(景物) 삼아 그 자체가 자연이 된 담양의 원림과 정자는 하나같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가벼운 산책만으로도 마음의 묵은 때를 씻을수 있어 좋다. 먼저 명옥헌을 찾는다.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한 원림이다. 광해군 때 낙향한 명곡 오희도의 아들이 선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꾸몄다고 한다. 마을입구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을 지나 올라서면 갑자기 별세계가 열린다. 수십그루의 배롱나무가 만개한 꽃으로 발갛게 물들어 무릉도원을 방불케 한다. 뒷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부딪쳐 내는 소리 같다는 뜻의 명옥헌 이름만큼 아름답다. 앞쪽에 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둥근 모양의 섬이 떠 있다. 전형적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연못. 우주만물의 존재와 운행원리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천원지방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연못 오른편 소나무와 배롱나무 꽃터널을 따라 조금 걸어들어가면 앞에서는 배롱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아담한 명옥헌이 모습을 보인다. 앞쪽 마루에 앉아 내려보는 맛이 일품이다. 뒤편에도 방지원도형의 작은 연못이 있다. 계류가의 바위에는 명옥헌계유(鳴玉軒癸酉)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라고 한다. 명옥헌 뒤 처마 안쪽에 삼고(三顧)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후에 인조가 된 능양군이 반정의 뜻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 때 이곳의 오희도를 세번이나 찾았다 해서 붙였다고 한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했다는 고사를 연상시킨다. 후산마을의 은행나무도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인조대왕계마행이란 표지석이 있는 이 은행나무는 능양군이 이곳에 들렀을 때 타고온 말을 매어두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소쇄원. 언제 찾아도 좋은 원림이다. 중종때 양산보가 꾸몄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휩쓸려 유배되고 사약까지 받자 자신도 출세의 길을 버리고 낙향, 이곳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 등의 정자를 지었으며, 못을 만들고 담을 둘렀는데도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을 느낄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존중했던 선조들의 자연주의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소쇄원 옆 식영정에도 들른다.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산별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앞쪽 자미탄을 건너면 환벽당이 있다.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멋진 환벽당은 을사사화로 가계가 몰락해 이곳으로 내려온 소년 정철이 공부를 시작한 곳. 김윤제가 용꿈을 꾸고 만난 정철을 외손녀 사위로 삼고 뒷바라지를 했다고 전해져 온다. 담양=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