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타계한 한국무용가 최현씨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단아하고 섬세.화려한 춤 사위로 '멋의 예인', '선비',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주의자' 등의 별명을 얻었다. 그의 완벽주의적 경향은 의상.조명.소품.무대미술 등을 춤과 통일시키기 위해 몇 번씩 뜯어 고쳐가며 다시 만들었던 창작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일하던 스태프들은 공연을 준비할 때는 '너무 까다롭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역시 최현'이라며 예술가로서의 완벽성에 감탄하곤 했다. 무용극 창극 뮤지컬 등 100여 작품을 안무했으면서도 춤 인생 48년을 맞던 94년에야 비로소 첫 개인무대를 가질 정도로 공연에 신중했다. 이런 점 때문에 원로평론가 박용구씨는 최씨를 '제 살을 뜯어먹는 완벽주의자'라고 평했다. 또 교육자로서 서울사대 이화여대 중앙대 서울예고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으며, 80년대에는 한국무용협회의 침체한 분위기를 일신해 보겠다며 이사장 선거에도 뛰어들었지만 조직력이 없었던 탓에 무용계의 존경을 받았으면서도 고배를 마셨다. 날로 각박해지는 예술계 세태 속에서도 지인 및 선후배들과 밤 늦도록 술을 즐긴 호방한 기질 덕에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그 때문에 40대에 위궤양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며 후배의 공연장을 찾아 조언하는 등 그의 춤 사랑은 남달랐다. 최씨는 지난 4월 일본 토가 페스티벌의 초청을 받고 작품을 준비하던 중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54세가 되던 해에 나이가 절반(27)에 불과하던 제자 원필녀씨와 전격 결혼, 화제를 낳기도 했다. 원씨는 남편이자 스승인 고인의 춤을 가장 충실히 이어받은 전수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부부 합동 공연 「비파연」을 가졌다. 이 무대는 고인의 마지막 공연이 됐다. 꿈과 희망을 향한 무한한 열망이 담긴 그의 대표작 「비상(飛翔)」에 대해 고인과 절친했던 무용평론가 김영태 시인은 '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이라고 평가했다. 김 시인은 고인의 춤세계를 「허행초(虛行抄)」라는 시에 담아 표현한 바 있으며 고인은 다시 이 시를 모태로 동명의 안무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음을 비우고 예술을 위해 헌신한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표현한 이 작품에 공감한 차범석이 태주 이종덕 손기상씨 등 문화계 인사들이 '허행초사람들'이라는 모임과 '허행초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또 무용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문학 연극 서예 등 다방면에 걸친 문예적 관심과 재능을 보였으며 한때 영화에 심취,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함께 「춘향전」「시집 가는 날」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왕성한 지식욕으로 늘 책을 옆에 끼고 다니던 것도 고인의 생전의 모습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sisyph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