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고 하면 아주 까마득한 옛날을 뜻한다. 같은 뜻으로 '범이 담배를 피우고 곰이 막걸리를 거르던 때'라는 표현도 쓰인다. 까마득한 옛날은 언제를 말할까. 적어도 수천년 전은 돼야 할 듯싶다. 그러나 담배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고작 400여년 전으로, 임진왜란이 그 계기가 됐다. 한번 상륙한 담배는 금방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도입된 지 100년에 걸쳐 서서히 확산된 목화씨와는 사뭇 달랐다. 하멜은 그의 '하멜표류기'에서 "지금 조선 사람들 사이에 담배가 매우 유행해 어린아이들도 네댓 살부터 피우기 시작한다.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피워댄다"고 당시 풍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담배가 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남만국(南蠻國.지금의 인도네시아)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로 우러러본다"고 적었다. 조선의 존재를 기록을 통해 서양에 알린 네덜란드 선원 하멜은 1653년(효종 4년)일행 36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에 편입된 뒤 강진의 전라병영과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돼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일행 7명과 함께 탈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제주 표착은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인 '하멜 표류기'는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었다. 조선을 서양에 데뷔시킨 홍보대사역을 수행한 셈이다. 하멜이 표류해왔을 때 조선 관리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 통역자로 2년간 같이 지내며 그에게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쳐준 사람은 박연(朴淵.1595-?)이었다. 역시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하멜보다 앞서 1628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에 표착했다가 귀화해 조선 여자와 결혼, 남매를 두면서 완전히 이 땅에 정착했다. 박연의 네덜란드 이름은 벨테브레였다. 벨테브레, 아니 박연이 조선 땅에서 수행한 공로는 매우 크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한 박연은 병자호란 때 출전하는가 하면 명나라에서 밀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조작법을 가르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효종은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장수 이완에게 실무책임을 맡겼고, 박연으로 하여금 그를 보조하게 했다.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박연과 하멜의 후예다. 며칠이 멀다 하고 기적을 연출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국팀의 선전은 히딩크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연이어지는 승전보는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한국과 네덜란드를 지척인 일본과 중국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한다. 단순히 '풍차의 땅' '꽃의 나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웃사촌같은 친밀감이 다 싹트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약 400년 전에 맺었던 묘한 인연과 겹치며 한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명장 히딩크가 월드컵 첫승, 16강 위업달성, 8강 신화창조를 연거푸 이뤄내자 그에 대한 애정표현이 온갖 방법으로 속출하고 있다. 법무부는 명예국민증 수여를 검토중이고, 광주시는 '히딩크로'를 만드는 방안을 고려중이라고 한다. 동상 건립움직임도 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박연처럼 아예 귀화시켜 한국 사람으로 만들자고 기염을 토한다. 이런 목소리들이 일부 현실화할 개연성도 충분히 있다. 한국인의 숙원을 일거에성취해준 그를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도 아쉽다는 부채의식 때문이다. 이는 남제주의 용머리 관광지구에 '하멜 타운'을 조성해 올해 안에 하멜의 범선을 재현하겠다는 제주시의 발표와 더불어 눈길이 간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지금 열애에 빠져 있다. 네덜란드는 자국인 감독에 힘입어 한국이 연전연승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다고 외신보도는 전한다. 1997년 주한 네덜란드들인이 주축이 돼 결성된 '하멜 클럽'도 마치 내 일이라도 되는 듯 뿌듯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