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여름이 다가오면 동네 식당마다 "냉면개시"라고 씌여진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흔치 않다. 아마도 냉면을 4계절 취급하는 전문점들이 많이 생겨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된다. 냉면전문점에 가면 사시사철 냉면을 먹을 수 있지만 원래 평양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무더울 때 시원한 냉면을 먹으면 좋은줄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냉면이 처음 만들어진 계절은 겨울이었다. 농한기 심심할 때 비인기 곡식이었던 메밀로 국수를 뽑아 동치미국물에 말아먹었던 음식이다. 지금은 냉장기술덕분에 계절에 관계없이 먹을 수 있으니 냉면마니아들은 옛날에 안 태어난걸 감사해야 할 일이다. 냉면 만큼 섬세한 음식도 없다. 같은 음식점이라도 그날의 기온 습도 그리고 먹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냉면이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겨울철보다 육수의 간을 약간 진하게 하고 습도가 높은 날은 건조한 날보다 면반죽을 약간 되게 해야 최상의 냉면이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일이 조절해서 냉면을 만드는 장인(匠人)급 주방장이 흔치않다. 평양냉면을 잘하는 음식점들을 소개한다. 을지면옥(을지로3가.02-2266-7052)=육수가 너무 맑고 투명해 맹물인줄 착각할 정도이다. 동치미국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고기육수라 새콤한 맛은 없지만 고소하고 은은한 맛이 그만이다. 밋밋한 맛이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형제자매지간인 필동면옥,의정부 평양면옥등과 같은 종류의 냉면이다. 이북출신들로부터 세음식점중 냉면맛이 가장 낫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남포면옥(다동.02-777-2269)=음식점 입구에 날짜별로 묻혀있는 냉면육수용 동치미항아리들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지머리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반반씩 섞어 냉면육수를 만들기 때문에 동치미를 잘 담그는게 키포인트다. 이 집 냉면은 동치미국물로 인해 새콤하고 간이 강한 느낌이 들어 한여름에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일본에서 매달 먹으러 오는 단골손님까지 있을 정도다. 을밀대(염리동.02-717-1922)=공덕동 로타리에서 서강대쪽으로 가다 오른쪽 한국통신 옆에 있다. 외진데 있어 비교적 덜 알려져 있었지만 지난해 김대중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전후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살얼음이 뜨는 육수의 맛은 우래옥 스타일이지만 면이 특이하다. 평양냉면 사리치고는 굵은 편이고 전분비율이 높아 탄력이 있다. 이 때문에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매주 한번이상 먹지 않으면 금단증상이 생긴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냉면맛이 이상하다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옆집건물까지 사들여 공간을 늘렸지만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야 먹을수 있다. 고박사냉면(평택시내.031-655-4252)=창업자 고순은씨가 냉면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사람이다. 고씨는 냉면의 생명은 육수에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다 좋은 김치만 곁들이면 최고의 냉면맛을 낼수 있다는 것. 실제로 먹어보면 공을 많이 들인 육수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쇠고기 육수와 동치미국물의 배합비율이 최적의 상태로 맞춰져 있다. 냉면김치도 서너 가지가 나온다. 신촌 등 여러 곳에 분점이 있지만 본점 냉면과 맛의 차이가 크다. /최진섭.맛칼럼니스트.MBC "찾아라!맛있는 TV"책임PD (choijs@m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