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호인 경주시 배동 포석정(飽石亭)은 지금까지 학계 견해와는 달리 통일신라 말기보다 훨씬 빠른 7세기 무렵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기 이전인 삼국시대에 건립됐다는 발굴보고서가 제출됐다. 이는 포석정이 종래 알려진 것처럼 흥청망청 술마시고 노는 데가 아니라 신성한 사당이며,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 세워져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신라인 김대문의 작품임을 사실상 선언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는 최근 발간한 「포석정모형전시관 부지 시굴조사 보고서」에서 출토 유물로 보아 포석정 관련 건물은 빠르면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늦어도 7세기 중반에는 건립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경주시가 포석정 동남쪽 담 바깥 70m 일대에 추진중인 '포석정 모형전시관' 건립을 앞두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8년 4월 17일부터 같은 해 5월13일까지 실시한 발굴성과를 담고 있다. 발굴 결과 이곳에서는 성격 미상의 석조유구(石造遺構)와 함께 건물터 한 곳과 다량의 폐기된 기와무지가 확인됐다. 제작 연대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기와들 가운데에는 '砲石'(포석)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6점이 확인돼 많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보고서는 이들 명문기와 자체는 두께나 무늬,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말-고려초기로 생각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飽石'(포석)이라는 글자 대신 '砲石'을 사용한 것은 복잡한 글자를 단순히 음이 같은 글자로 빌려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발굴단은 건물터 담 홈을 메우는 데 들어간 긴목항아리(장경호.長頸壺)와 회청색경질 작은 항아리토기(회청색경질소호.灰靑色硬質小壺) 등은 지금까지 연구 결과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 유물로 생각되고 있으므로 포석정 관련 건물이 등장한 시기는 이보다 약간 늦은 7세기 중반 무렵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포석정의 성격에 대해 보고서는 명확한 주장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단순한 놀이시설이 아니라 학계 대다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사당 시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 보고서는 포석정의 입지 조건이 신라인들에게 성산(聖山)으로 인식된 남산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과 오릉(五陵), 지마왕릉 등 성소(聖所)가 집중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당과 같은 또 다른 성소(聖所)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포석정 발굴 성과는 지난 89년과 95년에 각각 한 종류씩 공개된 뒤 진짜다 가짜다 논란이 분분한 필사본 「화랑세기」 논쟁과 맞물려 주목되고 있다. 더구나 이번 보고서는 포석정의 성격 고찰에서 아예 필사본을 언급하고 있다. 고고학 발굴보고서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검토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고서 주장이 사실이라면 필사본이 신라 성덕왕 때 한산주도독을 지낸 김대문이 썼다는 바로 그 「화랑세기」가 맞다는 쪽으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필사본이 진본임을 주장하는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포석정이 사당이든 아니든, 삼국시대에 건립돼 있었음은 오직 필사본에만 나온다"면서 "이는 발굴성과 로도 확인됐으므로 진위논쟁은 이제 무의미해졌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