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 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