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번은 수도극장(뒷날 스카라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그레엄 그린 원작의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문단 선후배들이 모여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도중에 박인환이 벌떡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백철씨 저걸 알아야 돼.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그것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갈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철이 박인환에게 또 당했군!' 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이미 문단에서 대가로 대접받고 있던 백철로서는 난데없는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나고 환도할 때까지 박인환은 대구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며,경향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활동한다. 그는 다소 경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재기 넘치는 사람이고,사람을 끄는 특별한 친화력 같은 것이 있어 주변엔 문인뿐만 아니라 각계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친구들 중에 그보다 십여 년 연장자들이 많은데,이는 그가 자신의 실제 나이를 숨기고 4~5세 많게 부풀린 탓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박인환의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다가 돌아오면 암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시들을 써내려 갔다. 박인환은 그렇게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던 것이다. 그는 수중엔 돈도 없고,집엔 쌀도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다. 1955년 그는 대한해운공사에 취직을 하더니 남해호(南海號)라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갔다. 석달 뒤에 귀환한 그는 '아메리카 시초(詩抄)'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愛書家)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고 나중에 장만영은 회고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오석천(吳昔泉) 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 서적까지 슬쩍 집어들고 가기도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목마와 숙녀'는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그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화(戰禍)의 황량한 명동 거리를 누비며 거침없는 언설과 재치를 뽐내며 시대를 가로질러 가던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뒤였다.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한다(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이다).박인환의 기억의 착오였다. 그 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 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 준 것은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