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를 준비하기를 잘 했다.발목까지 빠지는 눈 때문이다.정읍에서 타고온 택시는 산 아래 작은 절인 연화정사 앞에서 돌아갔다.인적 없는 백색(白色)천지의 눈길을 30여분 올랐을까.목덜미에 땀이 밸 무렵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정읍시 칠보면의 칠보산 사자봉 석탄사(石灘寺).신라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지만 세간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천년고찰이다.깎아지른 산비탈에 선 모습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구도자같다.10여년전부터 이곳을 수행도량으로 삼고 있는 이 절의 조실 청소(晴韶·81)스님을 만났다.문병차 전주의 전북대병원을 막 다녀왔다는 노장(老長)은 인사를 건네자 법문으로 단도직입(單刀直入)이다. “불법(佛法)은 문자나 말을 좇아가면 거리가 천리여.법은 그냥 살아 있지 표현할 수가 없어.조주 스님이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心不是佛).지혜는 도가 아니다(智不是道)’라는 말이 맞느냐고 묻자 남전 스님은 ‘안맞다’고 했어.‘그러면 네가 일러봐라’고 하자 남전 스님도 그 말밖에 못했거든.왜냐,불법이란 말로 뱉으면 틀린단 말이야.그러나 말로 내놓지 않으면 보여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말로 하는 것이지” 노장은 “불법이란 하늘이나 자연이나 진리라 해도 다 같은 소리”라며 “일월(日月)이 모든 중생을 비춰 주고 따뜻하게 키워줘도 아무 상(相)이나 걸림,분별이 없는 것처럼 내 마음도 그래야지”라고 했다.어떻게 해야 불법을 알 수 있을까.노장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내가 나를 발견하면 그게 진리이고 자연”이라고 설명한다.스스로 공부해서 자성(自性)을 보라는 얘기다. “공부란 누구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거야.공부의 공(工)은 사람이 땅을 밟고 하늘을 등에 지고 있는 것이고,부(夫)는 하늘(天)을 뚫는 것이지.스스로 노력해서 진리가 하늘을 뚫는 게 공부라는 거야” 노장은 공부를 하려면 계율부터 지켜야 한다며 오계(五戒)를 하나하나 일러준다.내 목숨이 아까우면 남의 목숨도 아까운 줄 알고 살생하지 말라고 한다.특히 “육식을 하면 자비종자,착한 종자가 사라진다”고 강조한다.노장은 또 ‘불음주계(不飮酒戒)’에 금연을 추가한다.담배를 피우면 악취가 나서 좋은 신들이 접근하기 꺼리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 몸을 받은 부모의 은혜를 귀중히 생각하라는 거야.제 부모는 대접하지 않고 자식만 귀여워하니 나중에 자식들도 제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 하는 거야.생일이 되면 부모가 날 낳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나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는 않고 술과 고기에 노래나 부르니….제 부모한테 불효한 놈이 어찌 공부인,진리인이 되겠나”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저녁 공양(식사)이 들어온다.오후 5시,산사의 저녁은 무척 이르다.식구가 조촐해 한 방에 모두 모여 앉아 공양을 든다.밥이며 찬이며 보통 밥그릇에 담았지만 노장의 식사법은 발우공양이나 다름 없다.식사후엔 밥그릇,국그릇,찌게 냄비까지 물로 말끔히 씻어서 마신다. “바르게 사는 게 불법이고 도(道)야.진인(眞人),도인(道人)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고.남의 물건 욕심 안내고 남 욕하지 않고 술,고기 안 먹으면 걸릴 게 없고 시비당할 일이 없어.그렇지 않으니 걸리게 되고,어떻게 하면 안 걸리나 점쟁이나 찾아다니지” 노장은 공부하는 방편으로 참선보다는 ‘아미타불’ 염불을 권한다.평생 참선으로 살아온 수행자라서 뜻밖이다. “참선은 혼자서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들어 타고 가는 것이고,염불은 남의 배를 빌려 타고 가는 거라 더 쉽지.비유하자면 참선은 자력수행이라 좁쌀만한 돌을 놓아도 물에 가라앉지만 염불은 섬만한 돌도 배 위에 있어 가라앉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게다가 참선이 좋기는 하지만 자력으로 극복하기 어렵고 자칫 잘못 들어갈 가능성이 많아” 노장은 “화두를 일러주는 사람은 많아도 공부의 길을 잡아줄 사람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불법은 아는 법(지식)이 아니라 보는 법이라 보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다.그렇다면 염불로도 견성(見性)할 수 있을까.“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전에 내 자성도 알게 된다”고 노장은 설명한다. “공부하면서 나중에 잘 안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 안 돼.논두렁을 베고 죽겠다고 생각하면 돼.그러면 실제로는 논두렁 베고 죽는 일이 없지.하지만 잘 살려고 거짓말하고 탐내면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노장은 “염불이든 참선이든 마음을 뭉쳐서 일념이 돼야 진리가 통한다”면서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겁시즉일념(無量劫是卽一念)’이라는 법성게의 한 구절을 들려준다.한 생각이 무량겁이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라는 뜻이다. 노장은 새해를 어떻게 맞을까. “평생 공부해서 부처님은 못 돼도 조사(祖師)는 돼야 하는데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밖에 안돼요.그래도 말을 하는 건 초등학교도 가지 못한 사람들한테 길을 일러줘야 하기 때문이야.해는 가고 몸은 늙어지는데 공부는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얼마나 원통해.땅을 치고 울 노릇이지” 노장의 구도열이 놀랍다.밤새 산사를 뒤흔들어대던 눈보라도 아랑곳 않을 태세다.하산하는 길,발자국 없는 눈길을 걷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정읍=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