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덩이 같은 태양이 야자수 너머로 지고 있다. 남국의 정취가 진하게 느껴진다. 두터운 옷차림으로 만난 이국에서의 한여름이 지난 여름의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듯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바닷물결에 부딪혀 반사되며 일렁이는 포말은 나그네가 무척 반가운 듯 온갖 멋을 부리고 있었다. 형형색색 맛만 살짝 보여주고는 이내 사라져 버린다. 신이 내려준 춤과 전설의 섬 발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국에서의 첫날 밤. 발리의 음악과 춤을 알아야 발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노천 카페로 여정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달콤한 가멜랑 음악과 뇌쇄적인 무희들의 율동이 발리의 혼을 실은 듯 역동적으로 이어진다. 곳곳에서 어깨춤이 어울린다. 발리사람들은 음악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몸을 놀린다고 한다.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났다 죽는다고 할 정도로 춤을 좋아한다. 물건을 이고 다니는 여인들도 한결같이 춤을 추는 것 같다. 발리섬 전체가 무도회장 같다고나 할까. 이튿날 그 유명한 몽키댄스를 못본 아쉬움을 뒤로하고 킨타마니로 향한다. 야자수보다 낮게 지어진 건물이 이채롭다. 자연과의 조화 때문이란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자 잘자란 벼가 모습을 드러낸다. 음식과 꽃바구니를 인 아낙네들이 부지런히 걷는다. 제단에 쓰일 물건이란다. 장식을 한 듯한 대나무가 집집마다 국기게양대처럼 서있는 것이 신비롭다. 발리는 본토와 달리 힌두교를 믿고 있다. 섬 전체에는 4천6백여개의 힌두사원이 있다. 발리인의 생활에서 종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가족이나 마을의 전통습관 및 관광의 주요 대상이 되는 음악과 춤, 화장의례까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집에는 제단을 갖춰 놓고 있다. 희뿌연 구름 사이로 힐끗 바투산이 얼굴을 내민다. 장엄한 모습에 압도돼 잠시 정적이 감돈다. 바다 같은 화산호가 눈부시다. 높은 산 허리에 있는 킨타마니는 화산호를 바라보며 발리인의 식생활을 엿보기에 좋은 장소다. '나시고렝'(볶음밥)과 '가도가도'라는 야채 샐러드가 인기있는 요리다. 귀로에 원숭이사원에 들러 무리 지어 노는 원숭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진 한장 찍는 것도 관광 포인트. 추적추적 비가 뿌린다. 잠시 눈을 붙이자 영화 '엠마누엘부인' 촬영으로 더 유명해진 해상사원으로 마음이 앞서간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며 차가 멈춰선다. 장례행렬로 교통이 통제된 것이다. 극락의 행렬이 엄숙하게 이어진다. 힌두교에 장례의식은 최고의 행사다. 죽은 사람의 지위나 덕망이 높으면 무척 화려하게 치러진다. 마침 보름날. 영혼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가지 못한 망자들의 합동장례식이 조촐하게 치러지는 날이란다. 경건한 마음을 뒤로하고 땅거미가 드리울 무렵 석양을 이고 타나롯사원이 떠오른다. 두부 모 썰어놓은 듯한 퇴적층 위에 나그네를 경계하듯 바다의 수호신처럼 우뚝 솟아 있다. 파도는 나그네를 시험하듯 살짝 때리고 지나가지만 수백년 해풍을 견뎌온 수호신은 이끼 낀 그 모습 그대로 우리들 품에 안긴다. 발리의 모든 것이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관광엽서를 파는 꼬마들의 외침도 아스라하게 들려온다. 저만치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부인이 임신하면 아이를 나을 때까지 수염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 이 곳의 풍습)가 제단에 쓰일 음식을 들고 걸음을 재촉한다. 믿음 안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 그들. 오늘도 저녁제사에서 가족의 안녕과 조상의 음덕을 기원할 것이다. 신이 가는 길에 꽃잎을 뿌려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발리 사람들. 이 모두가 힌두의 전통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닐까. 발리=여창구 기자 yc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