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비와 두 남매가 있었다. 그들은 소리꾼으로,아비는 타고난 소리꾼인 딸의 소리를 관리하고 뒷바라지한다. 득음을 하려면 한이 있어야 하는 법.그 한을 가지게 하기 위해 아비는 딸에게 눈이 멀도록 약을 먹인다. 오라비는 이 일로 도망을 가고 딸아이는 눈이 먼 채 득음의 경지에 이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누구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년)를 떠올릴 것이다. 이 공전의 히트작은 일찍이 전라도 지방의 전통가락에 대해 오래도록 관심을 기울여 그 소리꾼들을 '남도 사람'(1977년) 연작에 담아온 작가 이청준의 단편 '선학동 나그네'(1980년)를 주요 원작으로 만든 영화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끌어낸다. 소리꾼이 장님이 되면 진정 한을 품고,그 한으로써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즉 신체적인 불구나 지독한 성격장애 등에서 빚어지는 극단적인 소외와 고립이 진정한 예술가의 전제 조건인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우리의 많은 '예술가 소설'들은 대체로 이 문제에 동의하는 것 같다. 유익서의 '민꽃소리'(1989년)를 보자.어떤 규범도 질서도 매겨지지 않은 원초적인 광활한 자유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탁월한 대금 연주가 정명재는 소아마비인데다 눈알 한쪽이 없어서 안구가 푹 패인 그로테스크한 외모를 지녔다. 그의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해 아내임을 자처한 여자도 자주 얼굴을 외면할 정도이다. 그 소외 속에서 그의 천의무봉한 대금 연주가 빚어진 것이다. 우리 소설사의 앞머리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예술가 소설인 김동인의 '광화사'(1935년)의 주인공 솔거 역시 '추한 얼굴을 형용하는 온갖 형용사를 한 얼굴'의 소유자.그가 원하던 '색채 다른 초상화'는 그가 광인이 되는 순간 완성된다. 이렇듯 뛰어난 예술이 그로테스크한 광인과 같은 예술가들의 영혼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예술가들도 살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상인일 것이므로 우리의 예술가 소설은 그 '예술의 길'과 그것을 방해하는 삶의 논리간의 대립 속에서 갈등하고 실패하는 예술가상을 부각시키는 일을 또한 주요 과제로 삼게 된다. 가령 '금시조'(이문열,1982년)의 천부적인 서화가 고죽은 죽으면서 금시조의 예술을 체험하기까지 타고난 개성으로 예술과 '도(道)의 예술'의 대립 사이에서 평생 갈등했다. '유자약전'(이제하,1969년)의 아마추어 여자 화가 유자는 산업화된 현실을 부정하고 진정한 예술적 자유를 꿈꾸다가 실패하고 암으로 죽는다. 주인공이 문인인 경우 좌절한 예술가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1934년)은 일제하에서 치욕적인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는 한 소설가(구보)의 내면의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세상은 '서정시인마저 황금광'을 찾아 떠나는 시대,구보는 자신의 영혼이 짓이겨져 있음을 느낀다. 이 경우 그 깨달음 자체가 하나의 예술정신을 표상하게 된다. '어느 시인의 죽음'(호영송,1983년)에서 살아있는 민중의 모습을 담겠다고 애쓰던 자칭 민중시인 소일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현실의 중압감이 그의 예술적 영혼을 짓눌러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소설 속의 무수한 예술가들은 현실적인 가치관에 억압된 삶을 살면서 고립과 소외,나아가 극단적인 장애와 불구를 체험한다. 그로테스크한 용모나 비타협적인 기행,부도덕한 방탕 등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비쳐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예술품을 빚어내든 그렇지 못하든,그들의 영혼은 이 세상의 타락을 비추는 거울이며 그 타락을 정화시키는 해맑은 영혼의 청량제임에 틀림없다. 박덕규 (소설가.협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