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달은 넉달 동안 머물던 공사판에서 일이 없어지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던 그는 정씨를 만나 동행이 된다. 정씨는 교도소에서 목공.용접 기술을 배우고 출옥하여 공사판을 떠도는 노동자다. 그는 영달이와 달리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삼포로 가는 길이다. 그들은 찬샘 마을에서 도망친 술집 색시 백화를 잡아오면 만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행선지를 바꾼다. 도중에 만난 백화는 스물두 살.열여덟에 가출해 술집을 전전한 그녀의 신세가 측은해서 그들은 함께 가기로 한다. 눈 쌓인 산길을 함께 가다 길가의 폐가에서 잠시 몸을 녹이는 세 사람.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년)에 나오는 풍경이다.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행로를 따라 눈길을 헤쳐 걷는 떠돌이 막노동꾼과 작부.이들에게서는 고단한 삶의 생채기와 아련한 꿈의 생기가 묻어난다. 황석영의 '객지'(1971년)에 등장하는 간척지 일용노동자 동혁에게서도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과 품팔이의 힘줄이 불끈거린다. 매일 '자기의 노동'을 떼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들은 상황에 따라 잘 팔리는 물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잉여품으로 시장에 나뒹굴기도 한다. 한 달에 얼마짜리 상품에 불과하지만,그런 속에서도 자기의 인간적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안쓰러운 몸짓을 계속한다. 우리 소설들은 노동자라는 직업에 스민 그 이중성을 포착하고자 노력해 왔다. 우리 사회에 공장이 처음 세워지던 시절.말 못할 가난과 절망이 함께 짓이겨진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한설야의 '과도기'(1929년)에 등장하는 창선은 농부의 후예.간도로 나갔다가 4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공장이라는 '괴물'을 접하고 놀라지만 인생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 있겠는가. 그에게는 처음부터 만성적인 가난과 소외와 실업이라는 가혹한 노동조건이 따라붙고 있다. 일제시절 공장은 배고픈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번들거렸다. 어떻게든 공장에 취업해야 하는 젊은이들.그들의 절박한 단면을 통해 조선이 산업화와 더불어 경제적 파국을 맞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 유진오의 '오월의 구직자'(1929년)다. 어엿한 직업인인가 하면 인간 이하의 조건에 놓인 존재,이것이 신경향파와 카프가 활약하던 1920∼30년대 전반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노동자상이다. 서울이나 평양 인천 등지에 소규모 공단이 생겨나던 50∼60년대 노동자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등포 방직공장에 취직했다가 폐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보인다. 가난한 시골 소녀의 상경과 취직이라는 패턴은 채만식의 '병이 낫거든'(1941년) 이후 당시의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6·25 때 피난지의 한 제면공장에서 일하게 된 소년의 눈에 비친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호철의 '소시민'(1964년)에도 그대로 얼룩져 있다.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노동자의 면모를 뚜렷하게 그린 소설들이 많이 등장한 건 1970년대였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사람들의 일상을 거대한 톱니바퀴 속으로 몰아넣었던 시절.그것은 화이트칼라에서 공장 노동자로 변신해간 아홉 켤레 구두의 사나이(윤흥길의 '직선과 곡선'등,1977∼78년)를 거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으로 이어진다. 그 중에서도 난쟁이 노동자 '김불이'씨 일가(一家)가 무거운 '쇠공'을 짊어지고 환경이 오염된 공단가에서 살아가는 장면은 비극의 하이라이트다. 더구나 그 한스럽고 눈물겨운 삶의 주소가 '낙원구 행복동'이라니 참으로 얄궂다. 공장 굴뚝에 올라가 쇠공을 하늘로 쏘아 올린다는 '난·쏘·공'의 모티프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자의 꿈을 상징화한 것이다. 80년대에는 방현석 김한수 정화진 안재성 등이 수준높은 노동소설의 새 붐을 이뤘다. 특히 방현석의 '새벽출정'(1989년)에는 마산공단 같은 전형적인 공장지대가 배경으로 나타난다. 야근과 산업재해,철거,임금체불,폐업,파업,농성,구속 등 자본 대 노동 관계가 전면화된 시대의 그늘을 작가는 보여준다. 주인공은 산업체 학교에 다니는 어린 여공들.이 시기에는 노동자가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구로 공단에서 보낸 10대를 회상하고 있는 신경숙의 '외딴 방'(1995)은 뒤늦게 나타난 이 시대의 산물이다. 아무튼 한국 사회의 발전은 몸뚱이 하나가 전재산인 노동자들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이같은 사회적 부채의식을 드러내면서 소설사의 한 장을 빼곡이 장식하게 된 것도 이들의 몸에서 배어난 땀의 산물이다. 방민호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