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부석사 무량수" 중) 정일근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시와 시학사)는 유한하기 때문에 더 빛나는 삶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깊은 병마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시인의 체험이 일상의 작은 행위에서 새삼스러운 감동을 끌어낸다.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병으로) 몸이 먼저 깨달은 뒤 마음과 정신까지 알게 됐다. 육신의 훼손이 오히려 정신의 개안(開眼)을 도운 셈이다. 시 '부석사 무량수'는 짧은 목숨들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는 감성의 원천임을 지적한다. 시인은 시 '세월의 몸'에서 '할머니는 부러졌다 부은 뼈의 통증으로/비가 올 것을 아셨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시 '뜨거움'에선 칼에 벤 몸이 통째로 화끈거렸을 때 제 살의 존재를 느끼고 감사를 표시한다. '고맙다! 내 속에도 아직 뜨거운 불이 숨어 있으니'. 병마와 죽음에 대한 상념은 무엇보다 사랑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켰다. 시인은 그동안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줄 알았지만 마음속에서 상대를 놓아 보내고 빈자리를 만드는 게 참사랑임을 알게 됐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나에게 사랑이란' 중) 시인은 또 '내게 사랑이란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함께 호흡한다는 것이다,들숨과 날숨 고르게 쉬면서/이 밤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하회에서 안다' 중)고 고백한다. 맹목적인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어울림을 기약하고 있다. 평론가 정과리씨는 이를 "분할과 통일의 마술적 놀이"라고 지칭했다. 시인이 헤어짐과 외로움 등 분리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울림을 만들고 그 공명이 서로를 묶어주는 소명을 충실히 해내는 것을 빗댄 말이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