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작가 복거일(55)씨가 장편소설 "마법성의 수호자,나의 끼끗한 들깨"(문학과 지성사)를 냈다. 소설가 겸 사회비평가로 우리 시대 환부를 짚어내는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온 복씨가 이번에는 초로인생의 소외와 사랑을 성찰했다. 제목은 주인공 도린의 영원한 연인,정임(貞荏)을 상징한다. '끼끗한 들깨'는 '생기있고 깨끗한 들깨'란 뜻으로 정임의 한자를 풀어쓴 말. 마법성은 작품 속에서 시간이 멈춰 늙지 않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랜 세월 후 연정의 기억을 반추함으로써 구축되는 세계다. 시인이자 영문학을 전공한 도린은 50대 초반 직장에서 퇴출당한 뒤 번역일로 생계를 꾸리는 소시민이다. 그에게는 심장병을 앓는 딸과 빵가게서 일하는 아내가 있다. 무료한 일상을 통해 세포의 노화와 함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소멸돼 가고 있다. 어느날 젊은 시절 결혼하려다 실패했던 직장 부하이자 애인인 정임과 재회하게 된다. 그것은 '시간의 압제'에 저항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도린은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가물가물하던 사랑의 순간을 복원한다. 그 옛날 정임이 흘리던 눈물을 본 순간 도린은 사랑의 덫에 갖히고 만다. '사랑의 묘약'을 잘못 마셔 이졸데만을 사랑하게 된 트리스탄처럼. 도린에게 마법이란 결국 '사랑의 기억'이다. 옛 연인들은 현실과 마법의 행복한 만남을 경험한다. 그들은 천오백억년 후의 해후를 기약하면서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지만 원할 때 언제건 마음속에서 마법을 불러올 것임이 암시된다. 작가는 절제된 문체로 마법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애틋함을 배가시킨다. 복씨는 후기에서 "이 작품은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내의 이야기다.그가 시간에 맞서는 곳은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자리고,맞서는 방식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