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없는 침묵에도/빨간 혓바닥이 있음을 알겠다/아마존 열대에서 남극 빙하까지,/북적대는 풍물시장에서/봉쇄수도원까지,/지상의 풀잎에서 카시오페이아별까지,/붓다에서 예수까지,/의식의 광명에서 무의식의 심연까지,/삶과 죽음을 변(邊)삼아 시와 함께 걷는 오솔길이 있음도 알겠다/…'' (자서(自序) 중)

고진하(48) 시인은 새 시집 ''얼음수도원''(민음사)에서 세상과의 소통을 간결한 시어와 신선한 이미지로 노래한다.

3권의 전작 시집들에서 고독한 구도자의 길을 추구해왔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마침내 타자를 끌어 안는다.

시 ''자서''에서는 침묵으로도 우주와 교감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라일락''에서는 라일락의 향을 맡으며 우주의 은혜에 감사한다.

또 바닷물에 발을 적시곤 ''만물일체''의 진리를 체험하기도 한다.

시인은 현직 목사지만 산문(山門)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종교간의 벽''을 훌쩍 넘는다.

몇 년전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만남을 보고 쓴 ''연꽃과 십자가''에는 그의 이같은 신념이 깊이 스며 있다.

''벽이 허물어지는 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저마다 가는 길이 다른/맨머리 스님과/십자성호를 긋는 신부님,/나란히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는/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아름답네/…''

희랍인 조르바를 ''성스런 외도''라고 빗댄 그는 종교간의 벽 뿐만 아니라 성속(聖俗)의 경계를 넘는 대자유를 꿈꾼다.

그것은 버림으로써 새 것을 얻고, 비움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경지다.

''…/참 사랑은/먹는 자가 먹히는 자가 되는 거여/밥이 되는 거여,라고/아직 밥이 되지 못하고/낱낱의 쌀알로 맴도는 아들에게/밥되기를 가르치시는 나의 어머니, 나의 예수여'' (밥 중)

타인에 대한 참사랑은 값싼 구원에 매달리지 않고 무릎이 벗겨질 만큼 힘든 고행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시 ''예수''와 ''낙타무릎의 사랑2''가 그 증거다.

''세상이 오해하듯, 나는/세상의 중심인 적이 없다/…/오해의 비늘을 털어내고 똑똑히 나를 보라. 나는/그대의 값싼 연정을 짓밟는 파괴자'' (예수 중)

''닳고 닳은 무릎은 힘이 세다/우주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루짱이/움푹 패였다/기도는 힘이 세다'' (낙타무릎의 사랑2 중)

마침내 시인은 장작불을 일구기 위해 산화하는 숯처럼 순교자의 길을 택한다.

''재로 가는 성급한 소멸이 아니라/타자를 위해 검은 우회로를 밟도록 선택된/그댈 위해/나는 한 개비 인화물(引火物)이 되고 싶다/이글이글 그대가 피워 올릴 최후의 황홀한 미사를 위해''(숯의 미사 중)

그는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다. 신앙을 액세서리처럼 걸쳐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