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하게 우뚝선 문경의 주흘산(1천1백6m).

주흘산은 꿈이 컸다.

솟기만 해 봐라, 나라의 도읍을 껴안을테니.

느긋했던게 탈이었다.

그만 서울 삼각산에 뒤지고 말았다.

외로 돌아 삼각산을 등지고 앉았다.

주흘산은 그러나 삼각산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하늘재, 허리춤의 문경새재, 그 왼편 조령산 쪽의 이우리재 큰길을 차례로 터주며 삼국시대 이래 숱한 소통의 희망과 회한을 지켜보았다.

하늘재와 새재는 이우리재 신작로로 인해 굳이 넘지 않는 옛길이 됐다.

이우리재 역시 새 터널길에 밀려 같은 처지에 놓였다.

가보지 않은 길은 호기심 속에라도 남는다지만 다니지 않는 길은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사람과 그 흔적들은 시간의 침식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신라초 북진의지로 다져졌고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눈물로 쏟아냈던 하늘재는 어느새 기억 저편에 밀려 있다.

새재는 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5백년 왕조의 남북을 이었던 영남대로 길목이며 전략요충지이기도 해서 역사의 두께가 그만큼 두텁기 때문인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새재 옛길을 걷는다.

주흘관~조곡관~조령관으로 이어지는 시오리 길이다.

양쪽 들머리까지 넣으면 이십리가 넘는 산길.

얼마나 높고 거칠었으면 "날아다니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고 했을까.

솟아오르는 매의 형상인 주흘산의 시리도록 흰 눈빛을 받으며 제1관문 주흘관을 지난다.

너른 공터엔 6백년이 넘었다는 전나무 그루터기와 경북 개도 1백주년기념 타임캡슐을 묻은 곳이 보인다.

왼쪽 좁은 개울 건너의 큰 집이며 궁궐이 화려하다.

새잿길을 붐비게 한 TV드라마 왕건 세트장이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혜국사 들머리를 지나친다.

길은 유난히 잦은 게릴라폭설로 온통 눈밭이다.

눈녹은 물은 잘 빠져 질척대지 않는다.

돌담으로 둘러처진 원터가 나온다.

조선시대 관리나 여행객이 숙식을 해결하던 곳.

지금의 여관격이다.

안에는 왕건 촬영세트가 설치되어 있다.

원터를 지나 용추폭포(팔왕폭포) 앞에 선다.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을 일컫는 팔왕과 선녀들이 어울려 경치를 즐겼다는 곳이다.

폭포 위에는 교구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에서 경상도 신.구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했다고 한다.

원래 교구정의 흔적은 없고 갓지은 듯한 정자가 단청을 기다리고 있다.

꾸구리바위는 또 무얼까.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토종민물고기)가 바위 밑에 살았는데 이놈이 처녀를 희롱했다는 것.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주었다니 아주 막돼먹은 놈은 아닌 것 같다.

꾸구리바위 전설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배를 곯던 사람들 아니면 신분질서 타파를 꾀하던 혁명가집단이 이곳에 숨어들어 연명을 위해 했던 약탈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최초의 한글비로 추정되는 "산불됴심"비를 지나 제2관문인 조곡관 밑으로 들어선다.

새잿길 가운데 성이다.

3개관문중 지형이 가장 험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진터 앞에서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과 꿈속의 처녀원귀에 관한 전설을 회상한다.

20배가 넘는 왜적소식을 들은 신립장군으로서는 꿈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더 걸으면 두갈래길이 나온다.

인적이 드문 길은 장원급제길, 넓은 길은 금의환향길이라 이름붙여놨다.

장원급제길로 들어선다.

조금 옆으로 디딘 발이 눈에 빠져 걷기 어렵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징크스로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이 길을 택했다고 하지만 장원급제가 결코 쉬운게 아니란 것을 길이 보여주는 셈이다.

천지수기가 응집됐다는 곳의 칠성단 감투바위 책바위가 그나마 위안이다.

장원급제길은 금의환향길에 연결된다.

길 끝 새재 정상에 제3관문 조령관이 있다.

이제부터 내리막.

눈 때문에 미끄럽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넉넉하다.

오른편 괴나리봇짐을 진 자그마한 선비상이 배웅한다.

그 선비상의 모델은 금의환향길을 밟았을까.

문경새재=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