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바다가 걸어왔네/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그 어디인가,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눈이 없네/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그 어디인가,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가지마라 가지마라,하고 싶다/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바다가 중)

1992년 ''혼자가는 먼 집''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허씨의 시집은 ''마음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을 보고 떠도는 영혼의 이야기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며 가끔 터키로 고대 유적을 발굴하러 떠나는 허씨는 피로에 지친 늙은 개에게 자신을 빗댄다.

''강가에는 시커먼 솥/솥안에는 끓는 양잿물/커다란 나무 막대를 들고 누군가 솥 주변을 날아다니며 허둥거리는 남루를 젓는다//노래를 부르며 늙은 개들은 강가에서 서성이고 저만치서 세월은 지나가고''(그러나 지나가는 세월도 중)

끓는 양잿물 솥단지 옆에서 바다를 껴안을 팔은 그냥 ''아는 사람''집에 놓고 왔다고 말하는 시인.

그는 ''나에게 보낸 편지를 내가 받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고백한다.

''사라지는 상징을 앓는'' 그의 모든 작업은 시로 통한다.

경남 사량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김철식씨는 날선 언어로 기억의 숲을 베어내는 벌목공같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를 연상시키는 시편들에는 ''반란을 꿈꾸는 심장''이 숨어 있다.

''단 한번도 진정으로 짖어본 적은 없다,고 시간은 내게 말한다 패륜의 생이를 남겨놓고 달아나는 기억이 현재의 우위를 장악하자 치욕은 길을 잃었다,고…/날마다 구름속 달의 비웃음을 물어뜯으며 속력을 내어본다…퇴화하는 이빨 사이에 씹히는 죄의 흔적/나는 쓰레기 무덤 안에서 밤마다 다시 태어난다''(개의 자서전 중)

삶의 비극에 고착된 시선.

김씨는 상처 속에 신이 있고 치욕으로 기적을 잉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발바닥이 피를 삼키고 길 밖에서 자유로울 때까지'' 시를 쓰기로 작정한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이 아니라 ''잊은 적 없는''흔적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고통과 외로움의 사제인 시인은 생의 빈 구멍에 죽음과 파괴,전락과 자학을 채워넣고 있다"며 "죽음은 역설적으로 생의 유일한 출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욕정의 숲이었다가 또 때로는 반역의 진딧물이 활자처럼 진득거리는 숲이었던 내 기억의 청동숲,그러나 용서로 그늘을 드리우지는 못했던 숲,한번도 매서운 사냥으로 생계를 가꾸어보지 못한 조그만 벌레들이 논두렁에서 줄을 지어서는 차례차례로 길을 열어주었다…끝에서 바닥까지 숲의 전부를 이루던 드센 절망의 가시들아… 스스로를 착취하며 허리 펴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이제 태양의 맛을 알지 못하오…그리하여 남은 일은 봉인없는 일탈의 짐 거둬내는 것,숲의 더욱더 깊은 내부에서 선명한 멸절을 꿈꾸는 것,(…)오 환장할 듯 불순한 내 기억의 청동숲'' (청동숲 중)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