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녕전(華寧殿)작약''(목판에 유채,34X24㎝)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이 1935년에 그린 작품이다.

유화용 목판의 단단하고 판판한 재질 덕분에 유채의 발색 효과가 선명하다.

붉은 문짝의 담장문과 그 뒤 용마루가 하얗게 보이는 사당(祠堂)건물의 고풍스러운 풍정 및 쭉쭉 그은 회색 톤의 기와지붕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됐다.

평필(平筆)로 툭툭 찍어 전개시킨 빨간 작약 꽃들과 그를 에워싼 초록색의 넓은 꽃밭 분위기 그리고 원경의 나무와 숲은 빠른 붓놀림으로 처리한 현장 그림의 맛이 물씬 풍긴다.

화면 하반부를 수평으로 횡단시킨 꽃밭의 평면적 구성의 묘미는 작가의 표현 감각을 한껏 살려내고 있다.

게다가 꽃밭을 장식적으로 표현한 효과는 정월이 파리에서 체득한 야수파적 기법의 반영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월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향인 수원에 칩거하면서 ''서호''를 비롯한 수원 인근의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1918년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정신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이화학당의 지하실에서 엘리트 여성들의 비밀회합을 결성해 김활란 박인덕 황애시덕 신준려 등과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들은 1919년 3월1일 낮 12시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 대표들에 의해 낭독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조직적으로 입수해 비밀리에 배포했다.

같은 해 3월2일 진명여고 3학년이던 이정희는 진명 선배인 정월에게 전해 받은 독립선언문을 교내에 배포함과 동시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정월도 비밀집회와 독립만세 참가 모의 및 행동으로 김활란 등 동지들과 함께 검거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때 정월의 변호를 맡았던 김우영(金雨英)이 정월에게 청혼해 두사람은 결혼한다.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김건(金建)씨가 바로 정월의 아들이다.

정월은 1927년 남편 김우영(당시 만주 안동현 부영사)과 함께 일본 외무성이 정책적으로 베푼 구미 시찰 여행에 동행,모스크바와 동구를 거쳐 파리에 닻을 내리고 8개월 남짓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경향(야수파)의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파리에 있을 때 최린(崔麟)과의 스캔들로 결국 남편과 이혼,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정월과 최린의 스캔들로 서울장안이 떠들썩 할 때 동아일보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한 신문보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고 한다.

정월은 남편과 이혼하고 월간잡지 ''삼천리''에 자신의 과거를 기록으로 남긴 자서전적인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월간 아트인컬처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