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졌다.

짧았던 가을의 청량함은 떨어진 낙엽 아래 묻혔다.

단단히 벼려진 바람끝에도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영동 산간지방의 눈구름은 도심으로 진군을 서두르고 있다.

계절바뀜의 어수선함, 끝도 없는 경제위기의 경고음 또한 휑뎅그렁한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서해바다로 떠난다.

서해대교 시원히 뚫린 충남 서산땅으로의 짧은 여행이다.

옛 백제의 은근한 미소가 살아 있는 곳, 조선의 첫 국사인 무학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

그 미소와 예지속에서 새희망을 추스리기 위한 길 떠나기다.

평택 포승과 당진 송악 사이 20리(7.31km) 바닷길을 잇는 서해대교를 건넌다.

국내 최장이며 세계에서 9번째로 긴 대역사의 현장이다.

두지역 삶의 속도를 무려 50분이나 단축시킨 구조물이다.

조선시대 각종 포목의 집산지였다는 기지시리를 한참 지나 가야산록 용현계곡 중턱의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84호)을 찾는다.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마애불이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로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벼랑바위에 새겨져 있다.

인근 고풍저수지물에 수장될뻔 했다가 살아난 계곡입구의 이름없는 미륵불상과 느낌이 다르다.

한결 온화하고 낭만적이면서도 화려하다.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 마애삼존불상의 "미소"는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보호각 때문에 그 변화하는 미소를 볼 수는 없다.

긴 장대에 매달린 백열등이 하늘의 해를 대신한다.

인근 보원사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통일신라말 창건된 대사찰 보원사 터다.

규모가 하도 커 뜨물이 내를 이루었고 먼 마을에선 그 냇물을 끓여 숭늉으로 마실 정도였다는 것이다.

원래는 강당사였다고 한다.

강댕이골로도 불리는 계곡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큰스님의 강연으로 유명했다는 얘기다.

궁예를 피해 어릴적 산문에 들었다가 고려초 광종 때 국사가 된 탄문(보승)스님이 그 이다.

그 스님의 부도(보물 105호)와 탑비(보물 106호)가 절터 뒷쪽에 남아 있다.

절의 규모를 짐작할수 있는 석조(보물 102호)와 당간지주(보물 103호)가 있다.

중앙에 서있는 보원사지5층탑(보물 104호)은 강건한 맛을 풍긴다.

백제양식이라고 하는데 고려초에 세워져서인지 새왕조의 기상을 담고 있는 듯 하다.

보륜 보주 등이 없는 찰주만이 뾰족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지 모르겠다.

마치 경주 감은사3층탑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 보다 7년 앞서 도비산자락에 세운 부석사에도 들른다.

선묘낭자와 뜬돌(부석.검은여)에 얽힌 얘기까지 영주 부석사와 똑같다.

그리고 간월도로 직행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간월도는 간척사업으로 뭍이 된 섬.

고려말 무학은 지금도 밀물때면 섬이 되는 이 곳의 간월암에서 수행했고 어느날 바다에 비친 달빛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고 전한다.

경남 합천사람인 무학의 부모는 왜구에 납치됐다 탈출, 이곳 서산에서 살다가 꾼돈을 갚지 못해 관아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도망간 부친 대신 잡혀가던 만삭의 모친이 애정리 쑥밭에서 몸을 풀었다.

관아에서 풀려 나와보니 학이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탄생설화다.

애정리에는 최근에 세운 무학대사탄생기념탑이 있다.

무학대사는 스승 나옹화상에 의해 고려말 국사로 추천되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성계의 꿈을 해몽, 새왕조의 탄생을 예언했고 조선 최초의 국사가 되어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학은 볼 수 없다.

간척지의 겨울철새와 갈매기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왕조의 탄생을 미리 안 무학의 예지력.

그 능력이라면 지금 우리 모두를 짓누르는 경제위기를 풀 해답을 찾을수 있을까.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