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휘계를 이끌고 있는 재일교포 김홍재(46)씨가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서울대회를 기념하는 예술의전당 10월 음악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13일 내한했다.

친북한 음악인이라는 이유로 국내 무대에 서기 힘들었던 그가 처음으로 남녘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민족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좌절,그리고 성공의 신화를 담은 책 ''김홍재,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김영사)도 같은 때에 나와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는 "정말 감개무량하다"며 "서울공연은 여러번 제의받았는데 왜 그런지 연주가 임박해서 초청이 취소되는 안타까움을 맛봐야 했다"고 ''귀국 소감''을 밝혔다.

기자가 가장 의아했던 것은 단지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학이나 해외여행이 어려웠다는 사실이었다.

도쿄 국제지휘콩쿠르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주는 해외유학 기회를 ''조선인''에게 준 전례가 없어 2위로 밀려난 것(1979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외 콩쿠르에 참가하거나 개인적으로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을까.

"제 국적은 정확히 말하면 조선적(朝鮮籍)입니다.

한·일협정 후에도 일본이나 남북한 어느 쪽 국적도 갖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말하죠.

언젠가는 조국이 하나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국에서는 총련계로,일본에서는 무국적자로 찍혀 해외여행조차 힘들었던 거죠"

이 말을 듣는 순간 기자의 머리는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한국전쟁이후 남한행,북한행,제3국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북측 포로들의 고뇌를 그도 똑같이 겪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제3국행을 택한 거나 다름없다.

"음악의 세계에는 남도 북도 없습니다.

내 조국은 분단 이전의 조선일 뿐입니다"

그는 1954년 일본 효고현에서 총련계 학교 교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총련계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전국 예술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련계 학력은 일본의 국립대학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에도 그는 사립명문 도호대 음대에 진학해야 했다.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출근시간 전철타는 사람들을 객차에 밀어넣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시골출신으로 출발점부터가 달랐던 그는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졸업할 때는 도호음대의 대표지휘자가 됐다.

25세에 일본 최고의 음악상인 사이토 히데오 상을 받았고 98년에는 와타나베 아키오 상까지 휩쓸었다.

일본인이든,일본거주 외국인이든 이 두 상을 모두 수상한 음악인으로는 김씨가 유일하다.

그가 제2의 음악인생을 걷기 시작한 것은 고(故)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무국적자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뜻에 감명받은 한 독일여성의 도움으로 독일유학을 떠날 수 있었고 89년 베를린에서 필생의 스승인 윤이상 선생을 만난 것이다.

"생전에 윤 선생은 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셨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인간성마저 선생에게서 배운 바 큽니다.

선생의 악보를 정리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음악세계를 익혀나갔던 거죠"

이제 그는 재일 코리안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어한다.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한 교향악단을 조직해 2002년 월드컵 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음악회를 열고 싶습니다"

내한 연주회는 오는 20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윤이상의 ''무악(巫樂)''을 지휘하고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함께 부조니 ''피아노협주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02)580-3300

장규호 기자 sein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