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무뎌졌다.

한여름 내리꽂힐 때의 강기를 잃었다.

한결 길어진 그늘은 이미 한기를 품고 있다.

바람의 색깔도 바뀌었다.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너른 들녘은 2색 카드섹션 준비에 한창이다.

누릇누릇 구획져 고개숙인 벼가 성급히 앞서간다.

조금 더 있으면 황금빛 일색으로 물결칠 터이다.

어느새 한가위도 지난 초가을.

알알이 송이송이 매달린 계절의 향기가 달콤하다.

경북 김천의 청암사(靑岩寺)와 수도암(修道庵).

경남 거창과의 경계에 우뚝 솟은 수도산(또는 불령산.1317m) 자락의 천년고찰이다.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하는 깊은 계곡, 올망졸망 산마을의 풍치가 기막히게 어울린 수행도량이다.

산의 푸르른 정기가 계곡바위마다 이끼로 돋아난 청암사.

1백여 비구니 학인들이 발심(發心)의 자세를 추슬러 목숨 내놓고 용맹정진하는 터전이다.

이곳에는 어떤 인연,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을까.

일주문 앞까지는 무덤덤.

"들어갑니다"며 고(告)하고 밑자락부터 찬찬히 느끼며 올라야 할 산길을 자동차의 힘을 빌려 허겁지겁 달려온 탓인지 모르겠다.

마음속은 늘 그렇듯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음에 대한 탄식뿐이었다.

사바와 불국토를 가르는 일주문 안으로 발을 디디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까마득히 치솟은 적송과 전나무들이 호위하는 경내 오솔길이 적요했다.

열목어, 가재 등이 사는 계곡의 마른 물소리가 산뜻했다.

사천왕문 옆에 있는 여러개의 검은 비석 앞에 발을 멈추었다.

첫번째 비석에 "상궁정신녀천씨정공심공덕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찰에 웬 상궁(尙宮)의 공덕비인가.

저 앞쪽 계곡 맞은편 바위의 최송설당이란 글씨는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 컸다.

참배객이 장난삼아 새겨논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 최송설당은 또 누구일까.

얘기는 이랬다.

최송설당은 조선말 혼란기의 상궁.

고종과 엄비 사이에 난 영친왕의 유모였다고 한다.

최 상궁은 고종의 정비로 순종을 낳은 민비와의 왕실 갈등속에 영친왕을 돌보았다.

그 공로로 하사받은 금품으로 오늘의 청암사를 재건했다는 것.

조선말 혼란기와 왕실의 은밀한 얘기를 들려주는 흔적들이다.

청암사는 숙종때 인현왕후와도 인연이 깊다.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의 질투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을 때 이곳 극락전 안에 있는 별채에 기거했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를 기리던 최무수리가 숙종의 눈에 들어 영조를 낳기까지 왕실 내전과 관련된 얘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불교 유물로는 대웅전과 계곡으로 나뉜 쪽에 있는 보광전의 42수관음보살좌상이 있다.

사집반(四集班.2학년) 비구니 학인이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라고 한 이 불상은 원래 있던 것을 도둑맞아 새로 조상해 모신 것이다.

청암사를 나서 무골쪽의 수도암을 찾았다.

자동차가 열을 받을 정도로 가파른 곳에 위치한 수도암도 청암사와 같은 시기(신라 헌안왕 3년)에 지어졌다.

당시는 왕조말의 혼란기였다.

해상왕 장보고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신무왕의 동생 헌안왕은 딸만 둘을 둬 왕위를 노린 호족들이 득세했었다.

이때 왕족 화랑 응렴이 헌안왕의 눈에 들어 경문왕이 됐고 그 경문왕이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드라마 왕건의 주인공 궁예의 아버지다.

도선국사가 수도암터를 보고 일주일동안이나 춤을 춘 것은 혼란기를 수습할 인물의 탄생을 기대해 볼수 있는 명당이었기 때문일까.

처음 이곳에 와 중수불사를 일으킨 법전스님은 "선승, 고승들이 거의 모두 다녀간 곳이며 기도도량으로도 이름높다"고 말했다.

수도암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불상을 모두 볼 수 있는 사찰로도 이름 났다.

대적광전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신라), 바로 옆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296호.고려), 그리고 나한전의 나한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성계가 지시해서 모신 것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이것저것 보고 설명을 듣느라 해가 많이 기운 것도 몰랐다.

불당건물과 땅이 전하는 얘기가 그만큼 재미있었다.

이를 뒤로하고 돌아갈 시간이다.

가는 길에 상원리 방초정(芳草亭)에 잠깐 들러야겠다.

방초정은 이곳 출신 유학자 이정복이 세운 정자.

정자앞 연못에 두개의 섬을 만들어 놓아 조선시대 정원조경의 연구재료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정복 처의 열행비 앞에 서 있는 석이라는 노비의 비(碑)에 새겨진 글씨가 어필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에 노비의 묘비에 임금이 글씨를 내렸을까.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