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합니다. 부엌에서 그릇소리 날 때마다 고향 생각,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부모품을 떠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보지 않는 먼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학병으로 끌려가 막상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죽고 싶었습니다"(김수환 추기경)

가정의 달을 앞두고 시인 작가 예술인 66명의 사모곡을 담은 "어머니 찾아가기"(송명진 외편,혜화당,8천원)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가슴 적시는 모정과 빛바랜 사진,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작품 이야기,유년기의 슬프고 아름다운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김 추기경의 사모곡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 편"이었고 "연세가 많아질수록 얼굴이 더 맑아지던" 어머니.

그분은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들겠다는 뜻을 다 이루셨다.

소원대로 사순절 둘째 영복날(토요일) 돌아가시길 원하더니 바로 그날 평화롭게 가셨다.

김 추기경은 "옹기장수 아버지와 혼인한 뒤 평생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옹기나 포목을 이고 팔러 다녔고 고생도 무던히 했던 모항같은 어머니"에 감사하며 아직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엉뚱하게 눈물을 흘리곤 한다"고 고백했다.

시인 구상씨는 "마흔넷에 얻은 늦동이"였다.

일곱 남매 가운데 여섯이나 잃고 나서 본 막내여서인지 어머니의 사랑이 유별났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도 어머니로부터 길러졌다.

어머니는 "천자문""동몽선습"등 기초한문부터 고시조까지 가르쳤다.

그런 어머니에게 시인은 청춘의 반역과 방랑,유치장과 헌병대 출입,패결핵으로 온갖 상심을 안겨줬다며 가슴 아파했다.

해방 직후 필화사건으로 월남한 뒤 칠순 노구로 혼자 돌아가셨다는 풍문을 듣고는 "평생의 애물덩어리로서 불효가 두려워 저승에 가서도 뵐 낯이 없다"고 토로했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어머니는 사소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행복했다거나 슬펐다거나 하는 결론 없이 늘 "그랬더란다"로 끝맺는다.

신씨는 그런 어머니가 요즘 들어 "그 때가 좋았다"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애달프다고 썼다.

시인 박주택씨는 "얘야,힘들어 하지마라.네가 마시는 술에 네가 이기지 못하는 슬픔이 녹아있다는 것을 안다"고 다독여주던 어머니의 속깊은 정을 잊지 못한다.

극작가 차범석씨의 "죄짓는 일 말고는 무엇이든 열심히 해라.알것냐?",시인 배문성씨의 "성아,도라지는 말이 없다. 담백하고 착한 이 꽃 보듯이 살아라",화가 황주리씨의 "소가 되지 말고 새가 되라"는 경구도 어머니 품에서 얻은 것이다.

연극인 김명곤씨의 "영원한 봄처녀",무용가 최태지씨의 "완벽한 이상",아나운서 황수경씨의 "영원한 내편"에서도 "어지러운 세상을 감싸주며 박꽃같이 고운 얼굴로 늘 그 자리를 밝히는" 어머니의 체향이 그윽하게 느껴진다.

고두현 기자 kd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