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이 지리산 자락까지 올라 왔다.

제주 넘어 남해 지나 지리산 골골까지 에돌지 않는 기세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유채의 노랑, 동백의 빨강, 매화의 하양색 잔치를 벌인 뒤 지리산 넉넉한 품에 안긴 산수유의 노랑 꽃망울을 틔웠다.

1주일 뒤면 4월.

새천년의 따스한 시작을 여는 ''사랑의 봄''이다.

벚꽃과 철쭉으로 숨을 고르고 노고단~반야봉~천왕봉을 잇는 40km 구름바다를 건너서면 더이상 거칠것 없는 달음박질 차례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또다시 노란색 바다다.

하늘에서 물감을 쏟아부은 듯 샛노란 꽃물결로 일렁이고 있다.

겨울때를 뒤집어 쓴 상록수의 검푸른 모습과 무채색 산기슭에 대비돼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한다.

새봄이면 어김없이 내미는 산수유의 흐드러진 "봄 서신"이다.

가슴을 풀어 헤쳐도 더이상 춥지 않은 산바람과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어울려 봄기운에 생동감을 더한다.

산동면은 국내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

면내에 흩어져 있는 48개 마을에서 전국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산수유를 생산해 낸다.

1백년을 헤아리는 산수유나무 2만여그루가 밀집해 있다.

산동이란 이름도 산수유에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먼 옛날 중국 산둥성의 처녀가 지리산 이곳으로 시집올 때 가져다 심은 이후 오늘의 산수유 명산지로 불리게 됐다는 것.

산둥과 산동, 산수유와 산동의 말소리가 절묘히 맞아 떨어진다.

살아 숨쉬는 전설의 현장이다.

그중에서도 상위마을의 산수유색이 으뜸이다.

상위마을보다 "산수유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밑둥 굵은 산수유나무가 그만큼 많이 무리지어 있다.

마을을 지키는 20여호의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마을을 뒤덮고 있다.

아래로 4km쯤 떨어진 중동마을에서 지난주 열렸던 산수유축제의 남은 열기를 음미하며 걷거나 드라이브하면 점점 더 짙은 노란색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마을은 이미 원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상춘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마을위 만복대로 오르는 등산로로 들어서는 행렬이 이어진다.

아래쪽 당골마을에서 삼성재에 닿는 좀 가벼운 산행길도 비좁다.

긴 호스를 타고 당골 뒤 산길 초입에 떨어지는 고로쇠물 한잔을 운좋게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끝물때라 값은 비싸지만 지난밤 벌써 한통씩 비운 뒤라서 그런지 고로쇠물 맛에 대한 평이 한동안 이어진다.

4월 초순까지 샛노란 마을은 10월께 빨간옷으로 갈아 입는다.

4장의 꽃잎에 받쳐 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던 4개의 수술은 이때쯤 빨간 열매로 익어 온마을을 붉게 타오르게 만든다.

씨앗과 과육을 분리해 말린 뒤 한약재로 내다 판다.

요즘은 기계로 하지만 예전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이빨로 깨물어 과육분리 작업을 했다.

아낙네들은 입술에 남은 산수유 과즙의 약효로 젊음을 유지하고 사내들은 아내와의 입맞춤으로 오래도록 정력을 발휘했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산수유는 이 마을 사람들의 살림 밑거름이기도 하다.

이곳 산수유는 특히 과육이 두터우며 시고 떫은 맛이 덜해 값을 최고로 쳐 팔수 있었다.

때문에 일본으로의 수출량도 아직 많다.

"대학나무라고 불렀답니다. 서너그루만 있으면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해도 쪼들리지 않을 정도로 벌이가 좋았으니까요"

커다란 접시 가득 갓 구운 부침개를 담아 한번 맛보라고 내놓는 당동솔밭집의 박병철씨.

산수유 자랑에 얹혀 전해진 박씨의 푸근한 남도인심은 샛노란 산수유의 물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 산수유란 ]

산수유는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자생식물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식물이다.

키는 7m 정도이며 톱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목질이 단단하고 질기다.

잎은 마주나며 긴 달걀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다.

3~4월 노란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는 길고 둥글며 10월께 빨갛게 익는다.

씨앗을 발라낸 과육을 말려 술을 담거나 한약 재료로 쓴다.

동의보감에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강화시켜 장기복용하면 신장계통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등의 치료에 효과를 본다고 적혀 있다.

뭔지 모를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의 정신을 맑게 해주며 특히 남성건강에 으뜸이라고 기록돼 있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오줌싸개 치료에도 좋다고 한다.

산수유열매로 담가 잘 익힌 술은 마시기 아까울 정도로 색깔이 곱다.

맑은 주홍빛을 띤다.

술맛은 약간 시큼하고 씁쓸하며 입에 털어 넣으면 입안 가득 침이 배이게 한다.

산수유차는 산수유 20g을 물 1l에 넣고 1백ml가 될때까지 서서히 끓인다.

꿀이나 설탕을 적당히 타면 마시기 편하다.

[ 여행 수첩 ]

서울에서 구례까지는 3백30km.

경부.중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전주~남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전라남.북의 경계선에 놓인 밤재터널을 지나 7km쯤 더 가면 구례군 산동면이 나온다.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지리산온천장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상위마을까지 차가 들어간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할수 있다.

답사여행단에 합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리산온천장쪽에는 지리산온천호텔 노고단관광온천장 알프스장 제일온천장 지리산송원리조트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온천욕을 한뒤 인근 사찰을 찾아 불교문화에 젖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사찰중 가장 크고 장엄하다.

각황전앞 석등(국보 12호)을 포함해 국보 4점 등 수많은 문화재의 보고다.

각황전(국보 67호)은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큰 목조건물이다.

4사자3층석탑은 가장 아름다운 불교유물의 하나로 꼽힌다.

이 석탑과 조화를 이루는 "공양상"도 빼어난 미를 자랑한다.

지장암 옆 3백년 수령의 벚나무는 가장 먼저 벚꽃을 피운다고 해서 올벚나무라고 부른다.

천은사의 본래이름은 감로사다.

경내의 차가운 샘이 있어 감로사라고 했다.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해 많은 스님이 모였다.

임진왜란때 불탄뒤 중건할 때 샘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죽였더니 샘이 말라 숨었다고 해서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뒤 원인모를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 4대명필중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란 글씨를 물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 걸었더니 더이상 화재가 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구례=김재일 기자 kjil@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