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춘향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의 인물인가.

비록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수백년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온 한국인의
영원한 애인이다.

소설주인공으로 데뷔한 이래 수없이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스크린에 등장한 것만 열두번이고 보면 그녀의 매력이 한국인의 정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만하다.

대중이 생각하는 춘향의 이미지는 한국 전래의 여성상과 일치한다.

형리의 모진 매질에도 뜻을 굽히지 않을 만큼 독하지만 결코 앙탈하지
않았으며, 사또의 서슬퍼런 호령에도 기죽지 않을만큼 강인하지만 결코
항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낭군을 하늘같이 받들지만 속옷을 벗는 데도 법도를 지켰다.

그러나 열세번째 스크린속의 춘향은 그렇지 않다.

매를 맞으면서도 매섭게 사또를 훈계하는가 하면, 육례를 안치른 미등기
신부인데도 신랑만 나타나면 이불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알몸을 드러낸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성춘향만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규방의 새댁이 보여야할 다소곳함이 모자라 아무래도 거슬린다.

아예 현대적으로 번안한 작품이라면 모를까.

그럴 바엔 이몽룡을 플레이 보이로 그렸으면 어울렸을 텐데 첫날밤의
장면을 빼고는 자세가 너무 굳어있다.

불행히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멋진 촬영과 전개에도 불구하고 남녀
주인공의 어설픈 연기 때문에 "서편제"만큼 빛을 보지 못할 것 같다.

이 영화의 백미는 역시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일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인상을 줄만큼 스크린에서 조 명창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영화는 시종 판소리 대사에 맞춰 전개되는데 특히 귀신의 울음소리 등
독특하고도 구성진 육성은 판소리 가락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일종의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판소리가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압도하는
인상이다.

이와 함께 주변인물들의 토속적인 사투리나 촌부들의 걸직한 육담도 정감을
일으켜 남원땅의 러브스토리 분위기를 자아낸다.

창본을 따라 카메라가 비춰주는 경관들도 매우 환상적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펼쳐질 때마다 새 울음과 개울물 소리가 실감있게 울려
분위기를 돋운다.

왕조시대를 산 절세의 가인이 드디어 현대 영상기술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그러한 성춘향이고 보니 옥중면회때 신분을 숨겼다고 어사나리에게 투정을
할 만도 하겠다.

어쨌든 신분의 벽을 허물고 기생의 딸을 아내로 맞은 이몽룡이야 말로
일찍부터 개명한 선각자라 할 것이다.

차기 작품 제명은 "이몽룡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