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푼에 영어도 모르는채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시골 청년.

40여년이 흐른 지금 미국 철강업계의 대부로 성장한 노 신사가 자신의 삶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로 한국 젊은이들과 만난다.

패코 엔지니어링의 백영중(69) 회장이 펴낸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중앙M&B, 7천5백원).

미국 경량철골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하는 큰 기업을 일궈낸 백
회장이 성공을 꿈꾸는 이 땅의 젊은 벗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자신의
궤적과 함께 실었다.

사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요즘처럼 원대한 꿈을 키워갈만한 시대는
아니었다.

백 회장은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인생 목표로 여겨질 만큼 생존에만
매달리던 시절이었다"면서 그때를 회상한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인민군에게 잃고 고향인 평남 성천에 어머니와
형제를 남겨둔채 눈물을 머금고 피란오기까지 그는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어야했다.

고학으로 어렵게 연희대(연세대 전신)에 다니던 그가 인생의 전기를 맞은
것은 흥사단과 인연을 맺고서였다.

이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면서 엔지니어의 길로 들어섰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그에게 인종차별은 그리
높은 벽이 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철제 구조물 수요가 폭증했을때 그의 실력은 빛을 발했다.

철 구조물을 베트남까지 운반하기 어렵자 그는 기둥과 천장부분 연결을
기존의 용접에서 볼트 방식으로 바꾼 신 기술을 개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팩스 니(Paik''s Knee)"로 이름 붙여진 이 기술은 곧
미 국방부에서 채택했고 그는 유능한 엔지니어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이후 세일즈 경험을 쌓은후 지난 74년에는 자신의 회사 패코 엔지니어링을
창업하고 "주름잡이 빔"을 선보여 또한번 시장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성공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백 회장이 내놓는 충고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처럼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정도를 걸으라는
것이다.

음모와 술수없이도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할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는 또 젊은이들의 창업을 적극 권한다.

자기 사업을 일으켜 창조와 개척에 힘쓰는 진정한 기업가가 되라고
강조한다.

백 회장은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고 젊은이들을 격려한다.

< 박해영 기자 bon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