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간첩이 떴다.

잠수함으로 해안방위선을 돌파, 한적한 서해안에 상륙했다.

"진돗개 하나"가 떨어졌다.

난리법석이다.

오래 걱정할 일은 아니다.

도주로를 봉쇄한 용감한 국군에 의해 일망타진됐으니까.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살펴야 하는 법.

공작조 한명이 해안가 바위를 은폐물 삼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역시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리숙한 애송이 간첩에 불과하니까.

"간첩 리철진"(감독 장진)은 소재가 특이한 영화다.

간첩이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첩보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칡덩굴 같이 얽힌 음모는 물론 총알이 난무하지도 않는다.

궁지에 몰리던 "우리편"이 결국엔 승리한다는 첩보물의 뻔한 이야기같은
전개구조에서도 벗어나 있다.

간첩하면 떠올리게 되는 진한 이데올로기 싸움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멜로드라마에 얹은 코미디물의 전형을 따랐다.

카메라의 초점은 "직업인으로서의 간첩"에 맞춰져 있다.

어쩌다 발탁돼 간첩질을 하게 된 순진한 북한청년의 6박7일간의 남파일기를
통해 그린 "인간찾기"며 "남북화해"다.

주인공은 간첩 리철진(유오성)이다.

해안에서 지령서를 씹어 삼키며 다지던 그의 공작성공의지는 날이 새기 전에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서울의 "겁없는" 4인조 택시강도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공작금과 무기까지
빼앗긴다.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탈취해야하는 그로서는
난감하다.

걸어서 접선장소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접선에 성공한 고정간첩 오선생(박인환)은 한술 더 뜬다.

"공작금은 가져왔냐"고 묻고는 "멍청한 놈. 다시 평양에 돌아가"라며
윽박지른다.

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간첩질도 돈이 있어야 근사하게 해낼수 있는 일이지 않는가.

남파 첫날의 악몽으로 잔뜩 움츠려 있던 철진은 오선생의 딸 화이(박진희)의
배려로 마음을 열고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들여다 본다.

우연히 들어간 은행에서 강도를 잡아 영웅대접을 받기도 하고 현실이 괴로워
택시기사에게 "평양가자"고 했다가 경찰서 신세도 진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난 간첩이다"라고 외쳐보지만 경찰은 "웬 미친소리냐"며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는 동안 화이와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그러나 당의 지령은 수행해야 한다.

신분탄로의 위협을 느낀 고첩들의 지시를 받고 북에서 함께 훈련했던 동료를
대낮 호텔에서 저격한다.

대담하게 연구실로 뛰어들어 마침내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탈취한다.

그러나 철진이 북으로 되돌아 가는 날 슈퍼돼지 유전자를 북한에 제공키로
했다는 남한정부의 방침이 TV뉴스를 통해 발표된다.

처음에는 자못 무겁게 시작해 시종일관 웃기다가 마지막엔 가슴 찡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코미디적 요소가 90%를 차지한다.

적재적소에 끼워 넣은 애드립 같은 대사에 웃음이 흘러 넘친다.

4인조 택시강도(정규수 이문식 임원희 정지현)는 요즘 우리영화의 "조연
시대"를 한껏 과시하듯 연기력을 뽐낸다.

유오성의 어벙벙한 간첩연기와 박인환의 생활에 찌든 고첩연기는 간첩에
대한 인간적 연민까지 이끌어 낼 정도다.

폼만 잡고 우왕좌왕 헤매는 기관원들의 모습은 영화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짭짤한 양념이다.

< 김재일 기자 kji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