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두울 때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 빛으로 삼는다"

난세의 제왕학은 인재 제일주의에서 출발한다.

군웅이 할거하던 후한 말기의 조조(155~220)도 "사람 찾는 일"에 최대한
공을 들였다.

그는 국부를 키우기 위해 인재 발굴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다.

혼란기였으므로 "능력"이 기준이었다.

"지금 세상에 지극한 덕을 지니고서 민간에 버려졌으나 과단성 있고
용감하여 적과 힘껏 싸울 수 있는 이가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소질을 지녀 장군이 될만한 이, 비웃음 받을 행실이
있거나 효심이 없지만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부릴 줄 아는 이가 없을 수
없다.

각자 자신이 아는 이를 천거하여 삐뜨리지 않도록 하라"("품행에 구애받지
않는 현인 천거의 명령")

오수형(46) 서울대 중문과 교수가 편역한 "천하경영"(문학과지성사)에는
조조가 난세를 건너는 법이 잘 드러나 있다.

조조는 둔전제와 전매제도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군비를 확충하는데
주력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국의 첫째 조건이지만 당시의 유가적
분위기와 비교하면 조조야말로 근대적인 통치철학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간웅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유독 조조를 상기하며 "수많은 군기를 하늘
가득 날리며 강을 마주하고 술 따르며 긴 창 비껴 들고 시를 읊조렸으니
일대의 영웅이라"고 노래했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둘러 보자.

촉한중심의 "삼국지연의"에 그려진 묘사만을 따르거나 신하의 몸으로
왕실을 무너뜨린 쿠데타의 주인공으로 보는 시각만으로는 조조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누가 봐도 난세였다.

후한 말기 중앙 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이 권력투쟁에 몰두했으며 지방
호족 역시 세력다툼으로 밤낮을 보냈다.

착취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생할은 극도로 피폐했고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난을 진압하고 호족세력을 진정시켰으며 조정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가 비록 무력을 사용하면서 전통적 덕치방법을 상당 부분 외면했으나
혼란기의 질서회복에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창칼만 앞세운 건 아니다.

그가 남긴 시문에는 백성을 존귀하게 여기는 인본주의적 감수성이 진하게
배어있다.

그는 건안 시기 중국문단을 주도한 문장가이기도 하다.

난세일수록 문무를 겸비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

그의 악부시 "도관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천지간에/귀한 것은 사람이니/임금 세워 백성 다스릴 땐/준칙을 세웠다네/
수레 자국 말 발자국/사방 먼 곳까지 교차됨은/못난 자 쫓아내고 현명한 이
승진시켜/백성 번성 위한 것/(중략)/겸애하고 평등한 세상에선/먼 이도
가깝게 된다"

산문도 1백50여편이나 전해지는데 이 책에는 60여편이 소개돼 있다.

주로 인재 등용과 정책에 관련된 내용이 많고 편지글도 상당수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