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7년(1751) 초여름.

겸재 정선은 당대 최고의 시인 사천 이병연을 잃는다.

슬픔에 싸인 그는 사천과 함께 걷던 북악에 올라 인왕곡을 바라보며
장쾌한 필법으로 비 개이는 정경을 그려낸다.

진경산수의 걸작 "인왕제색"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겸재를 중심으로 조선의 고유문화가 한껏 꽃핀 문화절정기를 진경시대라고
부른다.

숙종에서 정조까지 1백25년간 시 서 화 전반에 걸쳐 가장 화려한 문화전성
시대가 펼쳐진 황금기다.

한국 가사문학의 서막을 연 송강 정철이나 "구운몽"의 서포 김만중,
한석봉체를 만든 석봉 한호, 풍속화의 귀재 단원 김홍도가 활약한 것도 이
무렵.

그러나 진경시대는 일제식민사관때문에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왔다.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실장이 동료 학자들과 함께 진경문화의 정수를 담은
연구서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전2권 돌베개)를 펴냈다.

이들은 진경문화의 뿌리를 조선성리학에서 찾는다.

율곡 이이에서 뻗어내려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조선성리학
은 중국중심의 주자성리학을 넘어 "조선중화주의"라는 주체적 이념을
탄생시켰다는 것.

이는 곧 한글가사와 소설, 우리 어감을 살린 한문문학 등 진경시의 기틀을
마련했고 서예의 한석봉체와 동국진체를 낳게했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와 조선풍속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숭유억불정책에 짓눌렸던 불교계에도 튼실한 문화유산을 남긴다.

필자들은 이같은 연구성과를 통해 "문화의 정체성 회복이 난국극복의
출발점"이라는 교훈을 던진다.

책에 실린 진귀한 도판 2백17컷도 진경정신의 깊이를 보여준다.

<고두현 기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