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수묵화같은 영화를 만드는 이란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의 92년작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장황한 할리우드식 어법으로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가 됐어야 할 영화다.

지진이 휩쓸고 가 초토화된 땅, 전기와 수도시설은 물론 식량도 부족한
형편없는 생존조건.

아이들의 스웨터 소매 밑은 너덜너덜 해져있고 누런 콧물이 마를 새 없다.

어쩌다 횡재하듯 얻어마신 코카콜라 조차 뜨거워(냉장고가 없으므로)
마시지 못하는 지경.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연인들은 결혼해 비닐천막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마을사람들은 월드컵 축구중계를 보려고 TV안테나를 설치한다.

지진의 참상을 자세히 전하던 아이는 "참 많이 자랐구나"하는 인사에
"사람은 누구나 자라잖아요"라는 어른스런 답을 낸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

그 묘사는 조금 모자란듯 하기에 더욱 설득력있다.

"그리고..."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편)와 "올리브나무 사이로"
(3편)로 이어지는 이란 북부지역 3부작의 한편.

중심축은 "내 친구..."에 출연했던 지진지대(코케마을) 거주 어린이
(아마드)를 찾아가는 감독의 행로.

작품 내내 감독은 어린 아들을 태우고 운전해 산길을 달려가지만 끝내
코케마을에는 닿지 못하고 아마드를 만나지도 못한다.

명쾌한 결말없이 과정(거의 대부분이 먼지 날리는 황토길)의 나열에
그쳤지만 그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할리우드에서였다면 수십억원을 들여 "스펙터클 재난영화"로 만들었을
소재를 담담하게 묘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리고"로
표현해낸 축약과 절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다.

관객의 반응은 대략 2가지로 나뉜다.

"키아로스타미도 이젠 지겨워"와 "역시 키아로스타미".

당신은 어느쪽일는지.

14일 동숭씨네마텍 개봉.

< 조정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