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덕 < 예술의전당 사장 >

역사의 좌표에서, 시간의 흐름속에서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산다.

이제 8백여일 남아있는 21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생각한다.

언론에서는 1천년동안 역사에 기록될만한 인물 1백명을 선정하기도 하고
1천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해보기도 한다.

그렇다.

우리앞에 뉴 밀레니엄이 곧 열리는 것이다.

새로운 백년이 아닌 새로운 천년.

건축가 김석철은 이 시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책 하나를 냈다.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그의 대표작이자 우리시대의 대표적 건축, 우리시대의 천년의 건축물로
기록될 예술의전당을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에
반가움이 앞섰다.

그리고 제목을 듣고는 김석철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다음 천년은 문화의 세기이고 그 문화의 세기를 준비한 대표적인 문화
인프라가 바로 이곳 예술의전당이 아닌가.

천년의 도시를 건축가의 시각으로 돌아본 전반부는 현재에 남은 것은
결국 건축이라는 결론을 말해준다.

역사는 역사책속에 있고, 여행은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시각을
고쳐준다.

경주는 신라의 중심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 도시로
형성된이래 천년이상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스 도시들을 서술한 그의 글솜씨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현장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감상기행 부분에서 필자를 사로잡은 것은 서울기행이다.

한강과 많은 산으로 싸인 아름다운 도시, 우리가 매일 일상으로 지나치던
모습들이 얼마나 오랜시간 다듬어졌으며 또 다듬어질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예술의전당을 지으면서 겪었던 일화들도 마음을 끌었지만 "문화도시화 운동"
을 선언한 그의 의견은 더욱 공감스러웠다.

외연의 성장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으니 내연의 불길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 그러기 위해 문화의 대공황을 맞은 우리 도시에 문화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반갑다.

문화의 세기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 중심에 선 예술의전당도 갈 길이 바쁘기만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