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일을 두고 완성시킨 작품이 사소한 실수로 인해 본래의 용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경우가 작가들에게 종종 발생한다.

간혹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1932년 마티스를 허탈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약 2년동안 길이 13m, 높이 3.5m에 달하는 "춤"이라는 대형 벽화작품을
각고 끝에 완성을 눈앞에 둔 때였다.

그런데 궁륭에 맞게 절단된 패널 상단이 50cm 모자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애초부터 작품이 들어갈 자리의 실측에 착오가 있었던 터였다.

그리하여 뒤에 발주처에서 적절히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마티스는
그것을 거절하고 다시 또 1년의 세월을 더 들여 다른 작품을 하나 더
해야만 했다.

마티스가 1931년 이 작품에 착수한 것은 당시 세계적인 컬렉터였던
앨버트 반즈 (Albert Barnes) 박사가 필라델피아 근교 메리온에 설립한
반즈 재단건물의 귀빈실 천장용 벽화를 직접 의뢰했기 때문이다.

반즈 박사는 51년 자동차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마티스의 작품을
75점이나 매입할 정도로 마티스에 심취해 있었으며 친분이 깊었다.

물론 그가 마티스에게 작품을 의뢰했을 땐 작가가 원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도록 배려했다.

이미 20년전, 그러니까 1910년 마티스에 매료되어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자
가로 5.91m짜리 "춤"을 주문했던 모스크바의 실업가 호슈킨 이바노비치의
경우와 흡사했다.

그때 탄생된 작품이 나중에 에르미타주에 소장돼 마티스의 대표작으로
부각된다.

이 작품은 청색 바탕에 붉은 다섯 나부의 원무를 그린 강렬한 이미지의
그림으로 고갱의 이국적이고 상징적인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현대인들에게 원초적 환희를 맛보게 해주는 비약적인 단순성과 상징성을
반즈박사는 기대했을 것이다.

새로운 야심과 의욕에 부푼 마티스는 니스의 대형 건물을 얻어 이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마티스가 반즈로부터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할 당시는 전보다 더 명료한
단순성이 화면을 지배해가던 때였으며 장차 보게될 일명 데쿠파주
(종이 오리기방식)가 시도되고 있었다.

세개의 아치로된 이 작품의 공간은 아무래도 구성상의 제약이 많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인체를 그려 오린 종이조각들을 화면 여기저기로 움직이면서
마음에 드는 배열 찾기를 수개월 계속하기도 했다.

전보다 더욱 간결하고 건축적인 맥락을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이
작품에 잘 반영돼 있다.

인체의 동작들이 보여주는 율동적인 면모들은 세개의 아치와 조화되고
있는 가운데 그 여백에 나타난 경사진 면구성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결국 정확한 실측에 따라 다시 그려진 작품은 크기만 바꿔 그린 것이
아니라 인물의 배치나 색상의 변화까지 가해졌다.

최초 6명의 인물을 두번째 작품에서는 8명으로 늘리게 된다.

문제는 먼저 그린 초대형 작품의 처리였다.

당시 파리에서는 가장 프랑스적인 이 작가를 그리 탐탁지 않게 보았던
모양이다.

그의 작품이 천덕꾸러기가 될 것은 뻔했다.

이후 가까스로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기는 했으나 지금은 첫번째
작품이 더 유명하게 되었다.

일반에 널리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그 작품은 소형 판화로도 제작이 되어 예상치 못한 인기를 누리게
된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