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의외의 인물이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대상은 평생을 미술에만 바쳐온 대가들에게만 수여해 왔던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주최측은 관례를 깨고 39세의 젊은 미국 화가에게 대상을
수여했다.

그 수상자는 다름아닌 "컴바이닝 페인팅"으로 유명한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다.

이밖에도 이때 짐 다인, 재스퍼 존스, 클래스 올덴버그 등 미국작가들이
함께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의 1세대 팝아트가 국제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계기가 됐다.

그리하여 미국 참가단의 책임자인 앨런 솔로몬은 "이제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졌음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라우센버그의 수상 이면에는 금세기 최고의 화상으로 꼽히는
레오 카스텔리가 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주최측과의 친분도 그렇지만 수상자인 라우센버그가 바로
카스텔리에 전속되어 있는 까닭에 전혀 근거없는 추측도 아니었다.

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 사람인 카스텔리는 화상의 폭넓은 역할과 위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바와같이 57년 뉴욕 이스트 77번가에 화랑을 개업했다.

1907년 트리에스트 (1919년 이탈리아로 병합)에서 출생한 그는 39년에
처음으로 화랑을 열었다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화랑을 개업한 이래 그는 당대 미술계의 양대 산맥을 이룬
시드니 제니스와 교우하면서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양식들에 관심을
보이며 생활비 지급을 하는 전속작가제를 처음으로 시행, 기량이 뛰어난
작가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굴지의 미술관들이 탐낼 작품들을 헐값으로 매입하여 값을 올리는 데도
발군의 실력을 보인 카스텔리는 의외로 비즈니스에서 신사적인 면모를
보여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70년대 한때 카스텔리를 보조하다 80년 유명한 메트로 픽처스를 개업해
미국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제닐 리어링이 한 말은
그의 품위있는 거래활동을 전해준다.

"화가들은 보통 자신들의 화상을 금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자신들이 속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유독 레오의 성실성만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신뢰를
주었습니다"

오늘날 국제 미술무대는 이제 국력을 겨루는 경쟁의 장으로 변모해 있다.

지난 80년대의 미술 시장에서 미국과 독일 이탈리아 작가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것도 문화적 국수주의를 전략적으로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쯤되면 예술성은 뒷전이고 로비 능력과 경제력만이 강조되는
폐단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우리는 좋은 작가를 세계무대에 진출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국제무대를 누비며 자국의 미술문화를 보호 후원하고 또 널리 상품화
시키는데 앞장설 유능한 세계적 화상이 절실히 요망되는 시점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