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은 체험과 사색의 깊이에 비례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페이 쉘던이 한 말이다.

뛰어난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지나온 "삶의 나이테"가 느껴진다.

요즘처럼 가벼운 읽을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삶의 무게가 담긴
깊이있는 작품이 더욱 기다려진다.

젊은 작가들의 독무대가 되다시피한 소설계에 중진들의 활약이 두드러져
관심을 모은다.

소설가 최일남(65) 이문구(56) 김원우(50)씨가 신작 중.단편을 모아
"샛길에서 나홀로" (강)를 펴냈으며, 이제하(60)씨는 오랜 침묵을 깨고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모래틈"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대하소설만 고집하던 김주영(58)씨는 계간 "작가 세계"에 중편 "홍어"를
선보였고 서정인(61) 김만옥(59) 이윤기(50)씨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진작가 3인의 "샛길에서 나 홀로" (강)는 이미 발표된 작품을 모은
기존 소설집들과 달리 미발표작을 단행본 독자들에게 곧바로 선보인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최일남씨의 단편 "오 아메리카"는 지난해 장편 "시작은 아름답다"처럼
작가의 오랜 언론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

미국 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연좌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중앙일간지
문화부장을 찾아와 "아들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노라"며 대서특필해줄
것을 부탁하다 가짜 박사임이 들통나자 자살한 노인의 얘기다.

큰아들의 부역으로 엉망이 된 집안을 둘째아들의 성공과 미국이라는
힘을 빌려 일으키려는 노인의 의도가 신문의 생리와 맞물려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문구씨의 중편 "장이리 개암나무"는 구수한 입담으로 한국 농촌의
현실과 공동체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농민소설.

가뭄이 들었다고 기우제를 지내고 진마딧산의 외지인 묘를 파엎자는
동네사람들의 언쟁, 농촌 현실을 외면하는 중앙 정치권의 몰염치를
비판하는 농심의 현주소가 걸쭉한 사투리에 배어있다.

"이승은 선착순이구 저승은 선발순" "낮맷돌에 휜 허리 밤맷돌에 풀자"
등 민중언어의 토양을 일구는 작가 특유의 속담형 조어가 소설읽는 맛을
더한다.

지난해 장편 "모노가미의 새 얼굴"로 현대 가정과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꼬집었던 김원우씨는 "샛길에서 나홀로.2"를 통해 정체성의 공동
상태에 빠진 중년남성과 세기말 한국사회의 본질을 깊이있게 조명했다.

근대화의 기치 아래 앞만 보고 내달아온 지난날과 언제나 "무르춤하게
비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비애를 지나 새로운 성찰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큰길 놔두고 샛길로 갈지언정 엇길로야 들어설까"라는 다짐은 혼돈의
시대에 던지는 하나의 이정표.

작가는 이같은 주제의식을 현재형 서술로 묘사함으로써 부박한 현실과
삶의 안쪽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