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입을 봉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빚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시집 "우주배꼽"에서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8일자).